프랑켄 마르크스(계몽주의 2.0+일반의지 2.0) = 프랑켄 마르크스 4.0

Ashihara NepuYona
3 min readFeb 27,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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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프 히스의 『계몽주의 2.0』(2014)을 읽고 있는데, 펜이나 종이(글쓰기)나 환경을 단순히 외부 기록 장치로 인식할 것이 아니라 그것과 인체(육체)가 결합한 내부-외부 불가분의 계산 장치로 볼 것을 요구하는 부분이 상당히 인상적이다. 또한 그런 내부-외부 불가분의 계산 장치에서야 가능한 효과가 ‘(보편적) 이성’이며, 이 책의 논의는 그러한 환경을 어떻게 만들 것이냐로 향할 것이라 보인다.

황호덕의 「프랑켄 마르크스」(2000)가 생각난다. 그 글은 유기적인 신체에 갇혀있지만 자연이란 비유기적 신체를 획득함으로써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마르크스를 읽어내며, 감관의 확장 그 자체를 문제삼을 것이 아니라, 확장을 해방적으로 조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른’ 감관들을 통해 ‘다르게’ 감각하라고.

(2000년에 쓰여진 글이 사이버 공간을 ‘통해서’ 싸울 것만이 아니라 사이버 공간 ‘안에서도’ 싸워야 한다고 지적하는 부분이 예리하다. 실제로 수많은 ‘좀비’와 ‘봇’, ‘트롤’들이 들끓는 인터넷 공간을 ‘방역’하고자 하는 노력은 여러 플랫폼과 단체들의 활동을 통해서 이뤄져 왔다.)

유기적 신체와 비유기적 신체과 결합한 위에서만 ‘인간’이 탄생할 수 있다는 두 글을 씨줄과 날줄로 엮으면, 새로운 의문이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는 ‘보편’과 ‘해방’을 동시에 획득할 수 있을까? ‘보편적 해방’이란 무엇인가?

아즈마 히로키의 길이 반면교사가 되겠지 싶다. 그는 “목소리-의식의 회로가 순수하게 있을 수 없는 것은 거기에 항상 이미 네트워크가 침입해 있기 때문에, 말하자면 살아있는 신체에 항상 이미 미디어가 접합되어 있기 때문이다”라고 쓰면서도, 숙의의 활성화를 포기하고 자동화된 『일반의지 2.0』(2011)을 지향했다.

아즈마 히로키의 논의는 기묘한데, 일반의지를 숙의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 특수의지들 간의 차이의 총합으로 파악한다. 그 스스로가 드는 예시로, 핵발전소를 어디에 지으면 좋을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무작위적으로 국민 의견들의 차이를 총합하여 ‘검색어 제안’처럼 제시하는 것이 일반의지라고. 참고로 그는 특수의지의 총합=전체의지와 개별의지들 ‘간의 차이’의 총합=일반의지를 스칼라와 벡터에 빗대어 설명하는데, 내가 코멘터리를 하자면 여기서부터 매우 회의적이다. 루소에 대한 해석이 옳든 그르든 말이다.

물론 그는 안전선으로서 ‘지금의 대의 민주주의 자체를 제거할 필요는 없다, 다만 국회에서 이 사안을 논의할 때 ‘검색어 제안’처럼 일반의지 2.0이 어떤 방식으로든 스트리밍되도록 하는 이중 구조의 생성을 강조한다. 즉, 의식과 무의식의 긴장관계를 정보기술적으로 의사 재현할 것을 주장한다.

이 논의는 ‘일반의지 2.0’의 샘플링이 ‘데이터 형식부터 수집 범위, 가공방식에 이르는 모든 부분이 정치철학을 내포(by 돌고래님)'할 것을 간과하며, 또한 이중구조화한다고 둘 사이 긴장이 발생하기보단 더 선동적인 정치가를 출현시킬 것 같다. 나로서는 일반의지 2.0은 정보기술 파시즘, ‘해방 없는 보편’이라 파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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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Ashihara NepuYo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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