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과 ‘메카’
나는 “일본 대만 한국은 제 2차 세계 대전 종료 후 태어나 냉전 시대에 그 기틀을 닦은 신생국”이라는 자학냉전(?)사관을 갖고 있다. 이 사관 속에서 일본 대중문화의 ‘메카’ 또한 역시 냉전에 많이 기초한다. 일종의 정치적 무의식으로서 전후민주주의-중공업-경제대국 일본은 병기를 쓰지 않되 방위는 해야한다는 인식이 깔려있다는 말인데, 이 글에서는 이 인식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려고 한다.
(*이 글은 오쓰카 에이지의 <아톰의 명제>란 글에 많이 빚지고 있다. 더 정교한 논의를 보고 싶다면 이를 찾아보길 권한다.)
예를 들어, 울트라맨이나 마징가, 과학닌자대 가챠맨 등등 많은 TV 방영 작품들이 체를 알 수 없는 우주인이나 세계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악당들이 쳐들어오고, 이를 (군대가 아니라) 특수한 엘리트 기관이 막는다는 식의 포맷을 취했다. 이에서 벗어난 경우도 많지만, 그럴 경우는 마쓰모토 레이지 작품들 혹은 루팡 3세 류의 해결사물처럼 주인공이 떠돌이로 묘사되곤 했다. 아무튼 이 국적불명의 특수한 엘리트 기관이, 과학기술이나 그 산물로서 병기를 방어전을 위해 다뤄왔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이 병기 = ‘메카’를 갖음으로써 전쟁을 일으킨 대일본제국으로 회귀하는 트라우마를 우회한 셈이다.
물론 아동층이 주된 시청자인 쇼에서 국제정세라는 어려운 걸 가져온다는 것 자체가 어렵기도 하고 (그런 점에서 많은 이들이 건담을 혁신적인 리얼로봇으로 평가한다), 당시 애니메이션 기술적인 한계도 있었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일본 대중문화가 정치적 무의식에 기대어 ‘방위전’의 형태로 전쟁과 병기를 그려왔다는 가설에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한 때 밀덕과 그들의 창조물에서 유행했던 ‘어떻게 일본은 평화헌법 9조를 우회해서 (장난감으로 잘 팔릴) 병기를 내보낼 수 있을까’ 하는 사고실험 또한 마찬가지로 “제 2차 세계대전 종료후 태어나” “냉전 시대에 기틀을 닦은” 전후민주주의-중공업-경제대국 일본이라는 모순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으리라.
이렇게 볼 때, 에반게리온 시리즈는 이 냉전적인 구도 위에서 (별다른 생각 없이) 리얼함을 입힌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이다. 아무리 UN밑에 네르프란 가짜 기관이 제 3동경시에서 싸우더라도 일본을 배경으로 실제 병기를 써가면서 싸운다는 리얼함을 그려넣으면 국가 권력적인 요소가 같이 동봉될 수밖에 없다. 새로운 에반게리온 모델로 네르프와 군수경쟁을 하려고 드는 것은 미국이며, 아무리 시대극의 닌자처럼 그려도 네르프 본부를 제압하는 것은 자위대이다. 리얼함이 늘어날 수록 국가 권력도 함께 팽창하며, ‘동봉된’ 국가 권력이 제멋대로 폭주해버린 게 <신 고지라>의 ‘거대불명생물특설재해대책본부’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신 고지라>의 ‘거대불명생물특설재해대책본부’는 비록 국가 기관 내에서 소외된 괴짜들로 구성되었다고 꼬리표는 달아놨지만, 여전히 엘리트 관료 집단이며 그 어떤 민주적 절차도 없이 전문가적인 판단을 통해서 지시를 내린다.
이런 식으로 군대가 방위하지 않는다는 상황의 문제점을 강하게 인식하는 건 오시이 마모루 작품들, 특히 쿠데타를 다루는 패트레이버 극장판 시리즈라고 할 수 있겠다. 오시이 마모루는 “007은 영국 여왕을 위해서 일해도 히어로지만, 일본의 히어로는 국가 기관에 직속되면 어딘가 어색하다. 그래서 히어로물이 되면 자꾸 스핀오프 기관에 맡긴다, 사이보그 009가 그렇다”고 말한 적 있다. 오시이 마모루의 시야에서 볼 때 일본은 ‘정상 국가’가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강력한 중앙통제 없이 내부의 기관이 서로 알력다툼을 하는 ‘내전’으로만 전쟁을 인식할 수 있다. 그렇기에 특수 기관이 쿠데타나 각종 사건을 해결하더라도, “본래라면 이렇게 흘러가서는 안된다”는 식의 시니컬한 결론이 내려진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정상 국가’로 회귀하자는 근대적인-우익적인 결론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오시이 마모루는 <패트레이버 2 the movie>를 통해 이렇게 주장한다 : ‘평화헌법은 거짓말이고, 일본은 냉전에 항상 봉사하고 미국에 빌붙어왔다. 그럴거면 차라리 군대를 갖고 똑바로 책임을 져라’ 라고. 물론, <TNG 패트레이버 : 수도 결전>에서는 그 ‘차라리’가 ‘왜곡 위에 또 왜곡을 입히는’ 행위라고 코멘트를 하긴 하지만, 그 논리에 핵심에는 여전히 ‘정상 국가’에 대한 갈망이 자리잡고 있다.
조금 본제에서 벗어나지만, 아이카와 쇼가 각본을 맡은 <남해기황/네오랑가>는 비슷하게 밀리터리 오타쿠적인 취향을 ‘리얼’하게 구현하되 국가 권력을 시뮬레이터 내에 삽입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괴수 ‘네오랑가’를 소유한 시마바라 세 자매가 무사시노 역 앞 동네를 ‘일본내 바로우령’으로 독립시킨다는 1기 결말은, 비현실적이지만 논리적이다. ‘네오랑가’와 같은 강력한 폭력을 사인이 독점한다면 일본과 그 뒤에 있는 미국과 맞서 싸우거나 이를 포기하는 수밖에 없으나, 독립국이라면 현재의 국제 정치 체제 내에서 어느 정도 더 타협의 선택지가 있다. 또한 네오랑가와 맞서 싸우는 다른 괴수들이 실은,일본 내 불안을 자극해 민족적 집결을 불러일으키려는 ‘허신회’에 의해 제작된 것이란 설정을 ‘얼굴 없는 괴물 = 외계인 = 이방인Alien’은 오히려 ‘국가’ 쪽이 아니냐는 비판으로 읽을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