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프물이 왜 싫냐면.
저는 사실, 그렇게까지 루프물이 싫지 않아요. 문제는 대부분의 루프물들이 <우르세이 야쯔라 ~ 뷰티풀 드리머 ~ > (이하 뷰티풀 드리머) 이상의 해답을 못내놓는다는 겁니다. 적어도 제가 본 애니메이션들 중에선요.
일단 뷰티풀 드리머 같은 경우는 그거야, ‘모두가 행복한 채로 시간이 멎어버렸으면 좋겠다’라는 라무의 ‘모성적’ 세계가 지배하는 곳이잖아요. 물론 그걸 꿈의 괴물이 이뤄주긴 했지만, 어쨌거나 그런 꿈이 계속되는 곳이었단 말이죠.
그 다음에 등장한 많은 루프물들은, 그런 꿈이 ‘악몽’이 되는 경우, 그러니까 그 안에서 행복이 아니라 불행을 소재로 했는데 말이죠, 그거는 사실 불행함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하는 것이니까 행복한 세계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뷰티풀 드리머에 비하면 너무나 약해요. 물론, 불행함을 무엇으로 포착하느냐에 따라선 뷰티풀 드리머를 넘어설 수 있죠.
그게 뭐냐하면, 불행함이 루프물임에도 불구하고 노 리터닝 포인트를 그릴 때의 얘깁니다. 즉, 그 루프물 안에서 ‘죽어가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거죠. 불행한 루프물 안에서는 다들 죽는데 무슨 소리냐고요? 아니, 근데, 그거 리셋되잖아요. 적어도 개체의 동일성(Identification)이 보장되는 인물들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잖아요.
딱히 주인공 혼자 경험을 쌓는 게 나쁜 게 아닙니다. 문제는 주인공 이외의 모든 환경이 원래대로 돌아가면서 ‘죽음’을 그려내지 못한다는 거죠. 물론 텍스트가 ‘죽음의 순간’을 그릴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있지만요, 적어도 죽은 뒤라는 건 있기 마련이거든요. 도무지 되돌릴 수 없는, ‘저 편’(피안)에 가있기에 용서할 수도 없고 용서 받을 수도 없으며 그 어떤 대답도 들을 수 없는 상태. 그런 상태가 그려지는 게 아니란 얘기죠. 물론 등장인물이 똑같이 등장해야하는 루프물로서는 어쩔 수 없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이거에 대해선 결론부에서 다시 말할 겁니다.
그 다음에 문제가 뭐냐면, 그 루프가 그저 세계가 아니라 ‘인공적 환경’이라는 점을 뷰티풀 드리머만큼 파고 든 게 없어요. “누군가”가 바라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계속해서 반복해서 일어나는 거거든요. 그게 제작자가 되었든 관객이 되었든 배우가 되었든 간에 말이죠. 즉, ‘루프’가 계속됨으로써 이득을 얻는 자가 있고, 그런 사람들이 있으니까 주인공이 루프물을 끊으려고 하는 발버둥마저도, 다시 그 루프를 계속하게 만드는 회로에 수렴하게 되요.
그래서 말이죠, 제가 보는 한에서는, 그러니까 애니메이션이란 틀 안에서 그런 이면을 비친 건 같은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스카이 크롤러> 정도밖에 없어요. 거기서 루프는 예전처럼 모두가 행복한 곳이 아니라, 끝없는 전쟁이 반복되는 불행한 장소입니다. 게다가 루프 중에 사람이 죽어요. 적어도 개체의 완전한 동일성을 갖고 있는 자가 다시 나타나진 않습니다. ‘닮은 사람’(클론)이 끊임없이 나타날 뿐이죠. 그리고 그 끝없는 전쟁이 끝나면 안되는 이유에 대해서도, 나름의 해설을 갖고 있고요.
저는 일단 그런 것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루프물이 싫어요. 특히나 후자에 자각적이지 않은 루프물, 그러니까 “누군가 바라는 사람이 있는 한 루프는 계속 된다”는 것에 자각적이지 않으면, 팬서비스라는 이름 하에 루프를 끝없이 계속해서 ‘구원’이후에도 좀비처럼 작품이 나타나는 걸요. 사골이 삭다 못해 없어질 때까지 계속 되는 거죠. 즐거운 시간은 계속되었으면 하고 라무가 바랐던 것처럼 말이죠.
ps. 다른 매체나 작품에서 제가 지적한 부분들을 해결한 루프물이 있다면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ps2. 여기서 중요한 건 ‘뷰티풀 드리머 이상’이 없단 겁니다. 그거 이하거나, 고작해야 그거랑 비슷한 수준의 해답(or 문제의식)을 갖고 있단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