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기”, “글쓰기”, 맥락의존성

데리다의 '에크르튀르'에 대한 기호학적 코멘트

나는 데리다가 “말하기보다 글쓰기가 선행한다”는 것은 그냥 과학적으로(혹은 고고학적으로) 틀렸다고 생각하는데, “글쓰기”와 “흔적”의 발명을 통해서 “말하기” 혹은 “현전”이 갖고 있어야 하는 맥락의존성이 결여되면서 언어와 사고에 급진적인 발전을 가져왔다는 의미에서 그의 글쓰기 관념에 동의하는 편이다.

“말하기”란 음성언어에는 반드시 상황/맥락이 개입하고, 설령 녹음기를 통해 시공간을 제거하더라도, 음성은 액센트나 뉘앙스, 소리의 크기가 고스란히 남기에 대화의 맥락을 반드시 지시한다. 반면, “글쓰기”는 시각매체를 통해 시공간을 뛰어넘어 전달하기 위해 고안되었기에 이런 맥락지시를 생략한다. 이 맥락 비의존적인 특성이 발달하면서 데리다가 말하는 “코라”가 발생한다(즉, 나는 “코라”를 시각매체에 의한 효과로 간주한다).

“말하기”의 기표와 달리 맥락지시가 생략되면서, “글쓰기”의 기표는 시공간과 맥락을 무시하여 축적된 기의들과 연결되고(“고어”), 동시에 전혀 상관없는 맥락 속에 편입되어 작동하는(“인용”) 복잡한 현상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 현상을 통해서 언어와 사유는 급격한 발전을 일으켰다. 따라서 내가 보기에 데리다의 이의제기는, 연대기적으로 먼저 존재했다는 이유만으로 “말하기”가 “글쓰기”의 특성을 열화된 것이나 불순물로 간주한 선언들에 대한 반박으로 보인다.

--

--

Ashihara NepuYona
Ashihara NepuYona

Written by Ashihara NepuYona

10.21hz : The Megalomainc Radio Tower

No responses yet

Write a respon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