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이시하라 요시로, <비관주의자의 용기에 대하여>

Ashihara NepuYona
21 min readMar 2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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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eb.kyoto-inet.or.jp/people/tiakio/yaziuma/kano/pesimist.html

쇼와 27년(1952년) 5월, 예년과 같이 노동절의 축제를 끝낸 하바로흐스크 시의 제6용소에서, 25년형으로 수감된 카노 부이치는 갑자기 실언증상에 빠진 것처럼 침묵했으며, 며칠 후에 절식을 시작했다. 절식은 누구도 모르게 행해졌기에, 주위의 사람들이 깨달았을 때는 이미 이틀 정도 경과했었다. 절식은 단식시위 형태로 행해진 것이 아니라, 절식 중에도 그는 다른 수형자와 함께 시내의 건설현장에서 조용히 일했기에 발견이 늦었던 것이다.

하바로흐스크에는, 6소용소 및 21수용소, 어느 쪽도 포로 시대의 호칭을 그대로 이어받은 두 개의 수용소가 있어서, 이른바 소련의 <비닉 전범>(샌프란시스코 조약의 일방적 성립에 대하여, 소련이 손아귀에서 보류한 포로/억압자의 일부로, 극동군사재판과 관계없이 소련 국내법에 의해 수형된 자들)을 수용하고 있었으나, 입소 경로는 전혀 달랐다. 6수용소는, 소련의 강제수용소 중에서도 가장 나쁜 환경에 속하는 바무르(바이칼-아무르 철도)노선 주변의 밀림지대에서 이동하여 온 일본인들이 대부분으로, 이동후의 완만한 회복기에 이르러 바무르 지대에서 심신의 동결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꽤나 불균형한 긴장상태를 경험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그 대부분을 점하고 있었다. 인간의 관계가 회복되어가는 과정도 꽤나 특수하여, 그것도 길고 긴 상호불신의 기간을 필요로 했다. 전술한 카노 부이치의 절식은, 우리들이 이러한 회복기를 거의 끝내려는 시기에 일어났다.

소련에 들어간 직후의 혼란과 수형 직후 바무르 지대에서 가장 곤란한 상황이란, 거의 두 번의 도태 시기를 겪고, 어떻게든 살아남은 우리들은 연령과 성격에 다소의 차이는 있어도 인간으로서는 완전히「균질된」 상태에 있었다. 우리들은 거의 같은 형태로 주위에 반응하며, 거의 같은 발상으로 행동했다. 나의 언동은, 시니컬하고 난폭하단 점에서 무서울 정도로 비슷했으나, 그것은 철저하게 인간불신 안에 갇혀 온 것에 대한 당연한 결과이며, 오랫동안 자기의 내부에 억압해왔던 강제수용에 대한 증오가 겨우 싹을 내기 시작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똑같은 조건으로 도태를 빠져나온 우리들은, 어느 시기에는 육체적인 조건마저도 아마도 거의 같았을 것이다. 우리들이 단독적인 존재로써 자아를 되찾고, 다시 주위의 인간을 돌아보기 위해서는, 더 긴 인내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카노 부이치만은, 그 받아들이는 방식에서도 행동에서도 다른 수형자들과 확연히 달랐다. 모든 억류 기간 중에 놀라울 정도로 평균화되는 과정 안에서, 처음부터 완전히 고독한 형태로 발상하며 행동해온 그는, 다른 일본인에게 있어 때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상한 존재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뒤에 가서 생각해보자면, 그러한 그의 자세는 애초에 그 때 시작된 것이 아니라, 처음으로 도쿄의 병사에서 얼굴을 마주쳤을 때부터, 귀국 직후의 그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항상 일관되어 있었다고 나는 추측한다. 그의 자세를 한마디로 줄이자면, 명확한 비관주의자였던 것이다.

카노와 나는, 같은 부대에서 교육을 받아 만주에 동원되어, 몇 번인가의 이합을 거쳐서는, 대부분 같은 경로를 거쳐 귀국했다. 카노의 정신형성에 있어 커다란 의미를 가질 이 경로를 하나하나 이야기할 여유는 없지만, 어느 시기의 카노에게 있어서, 나는 거의 유일한 친구였다고 해도 좋다.

쇼와 20년(1945년), 패전의 겨울, 카노와 나는 거의 동시에 하얼빈에 억류되었다. 억류의 계기가, 어느 쪽이든 백계 러시아인의 밀고였다는 것도 기묘한 우연의 일치다. 다음 해 처음으로, 카노는 북 카자흐스탄, 나는 남 카자흐스탄의 수용소에 각각 수용되었다.

내 최초 억압지는 알마 아타였으나, 여기서 3년의 〈미결기간〉을 거쳐서, 쇼와 23년(1948년) 여름, 선별된 일부 억압자들과 같이 북 카자흐스탄에 옮겨졌다. 그 해 가을, 이미 카라간다에 갔었던 카노는 다시 한 번, 사람을 거친 간단한 연락이 있었으나 그 후 소식불명인 채로, 다음 해 2월 나는 정식으로 기소되어 카라간다 시외의 중앙 아시아 군관구 군법회의 카라간 임시 법정에 신병이 옮겨졌다. 판결을 받을 때까지의 2개월 동안, 나는 법정에 부설된 독방에서 보냈으나, 어느 날 밤 늦게, 반대편 독방에 누군가가 수용된 것 같음을 눈치챘다. 그 때 나는, 주위에서 일어난 일에 거의 무관심했지만, 경비병의 무언가를 향해 “카노 부이치”라고 확실히 대답하는 목소리를 들었을 때, 놀라 벌떡 일어섰다.

그 다음 날부터 나는, 어떻게해서든 카노와 연락을 취하고 싶다, 그것만을 생각하며 지냈다. 소련병의 경비는 보이는 바와는 달리 후한 부분이 있었기에, 쌍방이 그럴 마음만 있으면 대부분의 경우 연락을 취할 수 있음은 경험으로 알고 있었으나, 카노 쪽에서 적극적으로 연락을 취해오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4월 29일, 나는 다른 독방의 수십 명과 함께 중노동 25년형이라는 예상 외의 판결을 받고 카라간다 제2형무소에 보내져, 상상도 할 수 없는 미지의 환경 속에서, 새로운 적응과정을 다시 한 번 밟게 되었다.

7월에 들어서, 새롭게 보내져 온 즉결형 집단이 다른 독방에 수용되었단 소문이 우리들 사이에 퍼졌으나, 나는 그 속에 아마도 카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소되어 무죄가 된 예시는 들은 적이 없으며, 판결을 끝낸 일본인은 전부 제 2 수용소를 경유하도록 되어있기 때문이다.

8월 초에, 이 새로운 집단은 탄광에 가까운 수용소로 이동되어, 며칠 뒤에 우리들도 그 뒤를 좇게 되었다. 이 수용소는 단기간의 형사범죄 전용 수용소로, 우리들과 같은 특수한 장기수는 수용할 수 없는 곳이었으나 소장들 간의 뒷거래로, 일시 노동력으로 융통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그러나 그 뒷거래 덕에, 나는 생각지도 못하게 카노와 만나게 되었다. 하얼빈에서 헤어지고 거의 4년만이었다.

우리들이 수용소에 도착한 것은 이미 취침시간을 대부분 지난 시각이었으나, 나는 부랴부랴 카노가 있는 가건물에 달려서 도착했다. 이미 잠들어 조용한 가건물의 입구에서, 나는 카노의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대답은 없었다. 두 세번 부른 뒤에, 가건물의 안의 어둠 속에서 카노가 나왔다. 그리고 나의 얼굴을 보지 않고 “너와는 만나고 싶지 않았다”고만 말하고,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나는 아연해져서 자신의 가건물로 돌아왔다.

다음날부터 우리는 토목공사에 차출되었다. 카노의 모습은 가끔씩 발견했으나, 어째선지 나를 피하는 모습에 나도 적극적으로 말을 걸기를 망설여져 일주일 정도가 지났다.

어느 날 저녁, 작업에서 돌아온 카노가, 불현듯 나의 가건물에 왔다. 그는 “저번에는 미안했다”고 말하고 잠시 주저하다가, “만일 네가 일본에 돌아가게 된다면, 카노 부이치는 쇼와 24년(1949년) 8월 x일(정확한 일자는 잊어버렸지만, 그가 이걸 말한 날이다) 죽었다고만 전해다오”하고는 돌아가 버렸다.

나는 그 때 그의 기묘하게 불안한, 안도에 가까운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나중에 가서 그의 사고의 궤적을 좇기 시작했을 때에서야, 당연하게도 그의 그 표정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때의 나로서는 그의 내부에서 무엇이 변했는지, 겨우 상상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 시기를 기점으로 비관주의자로서 그의 윤곽은 급속히 선명해졌다.

8월 말, 우리들은 급작스레 형무소로 돌려보내져, 몇 개의 집단으로 편성되어 하나 둘 카라간다에서 출발했다. 나는 선발집단과 같이 수인호송대에 넘겨져, 스토르이핀카(구금차)에서 시베리아 본선을 향하여 북상했다. 도중 페트로바우로흐스크와 노보시비르스크의 두 곳의 페레스루카(중계수용소)를 경유한 우리들은, 기대와는 달리 타이셰트의 페레스루카에 수용되었다. 이 타이셰트가 바무르 철도의 기점이란 것을 알았을 때, 우리들의 불안과 실망은 컸다.

우리들의 도착후, 며칠 뒤 카노를 포함한 후속부대가 도착했으나, 이미 그 때에는 동은 극동, 서는 우크라이나, 발트 삼국에 걸치는 지역에서 계속하여 보내져온 다양한 민족에 의해 페레스루카는 방대한 민족집단에 부풀어 올랐고, 우리들은 어느새 그 안에 삼켜져버렸다. 판결에 처해 본래 있지도 않았던 소련의 시민권을 박탈당한 우리들은, 여기서 완전히 소비에트 연방의 강제노동체제에 밀려넣어지고 말았다.

카노와 나는 여기서 일 개월만에 재회했으나, 우리들을 이어줄 말은 이 때 이미 없었다. 우리들은 갈 곳 없는 인간들처럼 틈만 나면 함께 있었으나, 얘기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카노와 나의 절대적인 차이는, 내가 살아남을 기회와 우연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더 남기고 있었던 것에 비해 카노는 전술한 바와 같이 희망을 확연히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타이셰트에 있는 동안, 희망의 부류에 속할 법한 말을, 카노는 일절 이야기하지 않았다.

십월 말에 가까울 즈음, 이 지방을 가끔씩 덮치는 가열찬 눈보라(프란) 속에서, 갑자기 에타프(수인 호송)의 명령이 나왔다. 우리들은 차례로 불려져, 차량 채로 편성을 끝내고는, 밤이 되어 인입선에 들어간 화물차량에 구겨넣어졌다. 서치라이트에 밝혀진, 엄중한 감시하에서 기묘한 승차풍경은, 그 다음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을 운명을 예상하기에 충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두운 화물차량 안에서 거대한 통이 두개 준비되어 있었으며, 하나가 음료수, 다른 것이 배변용이었음을 알게 된 우리들의 기쁨은 컸다. 〈달리는 유치장〉이라 불리는 스토루이핀카에서 경험으로, 인간은 허기에는 어느 정도 버티더라도 목마름과 배설에는 거의 버티지 못한단 사실을 알게되었기 때문이다. 스토루이핀카에서는, 배변은 24시간에 한 번이라는, 인내의 한도를 넘은 것이었다.

우리들은 화물차량에 오르기 무섭게, 다투어 물을 마셨다. 마실 수 있을 때 마셔두지 않으면 언제 마시지 못하게 될 지 알 수 없다는 죄수 특유의 심리가, 마시고 싶지 않은 자들까지 한 배 가득 마셨다. 변기가 있다는 안심도 있었으나, 그 용량까지 생각해 자제하려는 여유를 우리들은 전혀 갖지 못했다. 설령 있었더라도, 이미 시작된 혼란과 노호 속에서, 어찌할 도리가 없었으리라. 발차 후 수 시간에만에 통에 넘쳐나는 오물이 바닥 한 면에 흐르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삼일 간, 오물로 더럽혀진 주머니에서 빵을 꺼내 먹고, 오물 안에서 잠들어 지냈다. 수용소 생활이 거의 아무렇지 않게 일상화된 시점에서, 다시 우리들을 박살낸 이러한 경험은 이후 철저하게 인간성을 상실케하는 첫걸음이었다.

나와 카노와는, 이 때 별개의 화물차량에 나뉘어져 있었다. 화물차량은 노선주변의 수용소를 통과할 때마다 후미에서 한 량씩 떨어져 갔으나, 출발후 3일째에 우리들의 화물이 떨어져 나갔다. (우리가) 화물차량에서 나오게 된 것은 카노들과 더 북상해서 간 뒤였다. 시월 하순, 노선 주변의 밀림은 이미 눈에 덮여있었으며, 오물에 젖은 채인 우리들의 의복은, 잠깐 새에 새하얗게 얼어붙었다.

우리들은 즉시 “콜로나 33”이라 불리우는 수용소에 보내졌으나, 이 날부터 다음 해 가을까지의 1 년이, 8년의 억압기간을 통해서 최악의 기간이 되었다. 그러한 상황을 상세하게 서술할 여유는 없다. 다만 나 자신은 이러한 “탈인간적” 환경을 통과하는 것으로, 카노가 선취했던 비관주의에 결국은 도착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바무르 지대같은 환경에서 사람은, 비관주의자가 될 기회를 최종적으로 빼앗긴다. (인간이 계속하여 인간이기 위해서는, 주기적으로 비관주의자가 될 기회가 주어져야만 한다.) 왜냐면 누군가 비관주의자가 되면, 그만큼 다른 사람들이 살아남을 기회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산다”는 의지는, “남들보다도 길게 산다”는 형태의 발상만을 취하게 된다. 바무르 지대의 강제노동같은 조건 앞에서, 확실한 비관주의자의 입장을 취한다는 것은 놀랄 정도의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애매한 비관주의는 인간을 붕괴시킬 뿐이다. 여기서는 누구도, 하루만의 희망에, 기대어, 눈을 감고 낙관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다.(수용소에 특유의 음울한 유머는, 이러한 낙관주의에서 태어난다.) 이러한 속에서 카노는 시종일관 명백한 비관주의자로써 행동한, 예외적인 존재라 해도 좋다.

나중이 되어 알게 된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다. 이를 테면, 작업현장에 갔다 돌아와, 죄수는 반드시 5 열의 대오로 짜여져, 그 전후와 좌우에 자동소총을 수평으로 쥔 경비병이 행진한다. 행진중, 혹시 한 발이라도 대오와 떨어진 죄수가 있다면 도망 중이라고 생각하여 그 자리에서 사살해도 좋다는 규칙이 있었다. 경비병의 눈 앞에서 탈주를 시험해보는 일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나, 실제로는 가끔 행진중에 죄수가 사살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행진중 넘어지거나 발을 헛디뎌, 열외에 쓰러져서 일어난다. 엄한에서 얼음처럼 딱딱히 얼은 눈 위를 행진할 때는, 특히나 위험이 컸다. 그 중에서도 실전의 경험이 적은 일에 강한 열등감을 갖는 17, 8 세의 소년병 뒤에 서게 되는 것만큼, 죄수에게 있어 싫은 것은 없다. 그들은 계기만 있다면, 대부분 개를 쏘는 듯한 충동으로 발포한다.

희생자는 당연하지만, 좌와 우의 일열에서 나온다. 따라서 정렬할 때, 죄수는 다투어 중간의 삼열에 끼어들어, 가까이 있는 자를 바깥측 열에 밀어내려고 한다. 우리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조금이라도 약한 자를 죽음에 가까운 자리에 밀어넣었다. 여기서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가, 짧은 시간 동안에 무섭도록 뒤바뀐다.

실제로 본 자의 이야기에 의하면, 카노는, 어떠한 경우에도 나아가 바깥 측의 열에 섰다고 한다. 명확한 비관주의자이기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은, 이러한 태도를 가리킨다. 그것은, 황폐함에 가까운 행위이지만, 그의 비관주의 저 밑에는, 아마도 가해와 피해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나 의문이 있었으리라. 그리하여 그것은 그 상황의 한복판에 있어서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전해지지 않는 의문이다. 그의 행위는, 주위의 죄수에게 기이한 느낌을 주었더라도, 절대로 이상하지 않았다. 그는 가해와 피해란 집단적 발상에서 확실히 자기를 격리시킴으로써, 비관주의자로써 명석함과 정신적 자립을 획득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음 해 여름, 우리들이 전혀 알 수 없는 사정에 따라 노선주변의 일본인 수형자는 다시 타이셰트에 송환되었다. 우리들의 대부분은, 곧바로는 분별할 수 없을 정도로 쇄약해졌지만 그 중에서도 카노만은 일년 전과 거의 변하지 않고, 속죄를 끝낸 자처럼 차분했고 평온했다.

집결 후 얼마 지나서 다시 에타프가 편성되어, 시베리아 본선을 동쪽으로 향해 출발했다. 이 때엔 우연히도 같은 화물에 카노도 승합했으나, 피로때문에 거의 입을 열지도 않았고, 반절쯤 혼수상태인 채로 하바로흐스크에 도착했다. 도착 후 우리들은 이미 포로가 귀환했던 그 6 수용소에 수용되었으나, 건강검진에 입회한 군의가 쉽게 그 이유를 믿지 않았을 정도로, 대부분이 쇄약해져 있었다.

이 때부터, 우리들의 완만한 <회복기>가 시작되었다. 대우가 일반 포로 정도로 바뀐 것도 있어서, 건강의 회복은 생각보다 급속히 이뤄졌으나, 정신적인 회복은 예상치 못한 역행현상도 섞여 시행착오에 가까운 경과를 따랐다. 누구나가 정신적으로 깊이 상처입었으며, 가장 곤란한 상황에서 서로의 행동을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고작 1년의 강제 노동에 의해서, 인간으로써 잃어버린 건 우리들에게 너무 컸다. 그것들 하나하나를 되찾아가는 과정은, 바꿔말하면, 인간으로써 아픔이나 굴욕을 회복해가는 과정이 되었다. 1 년 후, 대부분 건강을 회복한 뒤에도, 우리들의 정신은 황폐해진 채였으며, 대부분 이유 없는 시기심과 이웃에 대한 악의에 우리들은 고뇌하고 있었다.

이 시기가 되면, 카노의 “기이한” 행동은 갈수록 명확해져 갔다. 매일 아침 작업현장에 도착하면 그는 지명도 기다리지 않고, 가장 조건이 나쁜 고통스러운 부서에 그대로 가버렸다. 가끔 같은 현장에서 나는 그가 일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으나, 마치 지면에 몸을 때려넣는 듯한 모습은, 그저 처참함 외에 그 무엇도 아니었다. 자신으로 자신을 가혹하게 처벌하는 듯한 그 모습을 나는 아득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 글의 모두에 적은 카노의 절식은, 이러한 정신의 <회복기>를 우리들이 겨우 벗어났을 때 일어난 일이었다.

카노의 절식은 그 때가 되서야 겨우 그의 행동을 이해하기 시작한 일부의 수형자에게 충격을 던졌다. 그들은 번갈아가며 카노를 찾아가 설득하려고 했으나, 이미 타계에 발을 들인 듯한 그의 침묵 앞에서는 모든 게 무력했다. 그 무력함을 마지막으로 나도 느꼈다. 모든 것을 선취했던 인간에게, 그걸 좇는 것만의 윤리가 무력한 것이 오히려 당연했다.

절식 4일 째의 아침, 나는 어쩔 수 없이 하나의 결심을 했다. 나는 기상 직후의 그의 가건물에 가서, 오늘부터 나도 절식하겠다고만 말하고 작업에 나갔다. 사정을 알게 된 작업반장이 나를 경작업으로 돌려주었지만, 저녁 수용소에 돌아갈 때엔 아무래도 지쳐 그대로 침대에 돌아누워버렸다. 석식 시한에 가까울 때, 혹시나 하고 생각한 카노가 찾아왔다. 드물게도 따뜻한 목소리로 같이 식사를 하자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휑뎅그렁한 식당의 구석에서 거의 말 없이 석식을 끝냈다. 그 이틀 후, 나는 처음으로 카노 자신의 입에서 절식의 이유를 듣게 되었다.

노동절 전일인 4월 3, 4일 카노는, 다른 일본인 수형자와 함께 “문화와 휴식의 공원”의 청소와 보수작업에 나가게 되었다. 가끔 트고 지낸 하바로흐스크 시장의 영애가 그걸 보고 심히 가슴에 사무쳐, 곧바로 자택에서 음식을 꺼내와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스스로 넘겨주었단 것이다. 카노도 그 한 사람이었다. 그 때 카노에게 있어 그런 환경 속에서, 인간의 건강한 따뜻함과 만나는 것만큼 두려운 일도 없었을 것은 틀림없다. 카노에게는, 거의 치명적인 충격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때부터 카노는 거의 살아갈 의지를 상실했다.

그것이 카노가 절식한 이유였다. 인간의 배려가, 이 정도로 용이하게 사람을 죽음에 몰아넣을 수 있다는 사실은 나에게 있어선 충격이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카노는, 더욱 단계를 내린 인간처럼 더욱 묵언했다.

카노의 절식 소동은 이로써 일단 진정되었으나, 수용소 측은 당연히 이걸 일종의 레지스탕스로 보고 집요한 추궁을 시작했다. 카노는 매일 밤처럼 취조실에 불려나가 늦어서야 가건물에 돌아왔다. 취조를 담당한 것은 “셰”라는 중국인의 상급보안중사로, 자신의 공적 외에는 염두에 두지 않는 남자였기에 카노와의 질답은 처음부터 심문과 동떨어졌다. 뿌리 끝까지 진 “셰”는, 마지막으로 태도를 바꾸어 “인간적으로 얘기하자”고 나왔다. 이러한 장면에서 마지막에 내놓은 “인간적”이란 러시아 말은, 죄수밖에 모르는 특수한 뉘앙스를 갖고 있다. 그건 “이 이상 추긍하지 않을 테니, 그 대신 우리들에게 협력해 달라”는 의미다. <협력>이란 말할 필요도 없이, 수형자의 동정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카노는 이것에 대해 “만일 당신이 인간이라면, 나는 인간이 아니오. 만일 내가 인간이라면, 당신은 인간이 아니오”라고 대답했다. 취조가 끝난 뒤에, 그는 이 말을 러시아 문법의 예제라도 암송하듯이, 무표정하게 나에게 반복했다.

그 때의 카노에게 아마도 이 말은 도발도 항의도 아닌, 그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승인한 것이리라. 그러나, 그러한 입장에서 이러한 발언을 하는 것의 불리점 역시 카노 자신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또한 여기서, 비관주의자의 명석한 눈과 만나게 된다. 나에게는 그 때의 카노의 표정을 확실히 상상할 수 있다. 그 때의 그의 표정에, 아마도 적의나 분노의 색은 없었으리라. 오히려 그러한 모순된 입장에 서 있는 것에 깊은 슬픔만이 있었을 것이다. 진실이란 것은, 항상 그러한 표층으로밖에 이야기될 수 없는 것이며, 그러한 표정만이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오히려, 기쁜 표정으로 이야기되는 진실이란 건 없다.

셰는 당연히 격노했으나, 이 이상 어찌할 수도 없이 취조는 타절되었다. 이후, 카노는 요주의 인물로 집요한 감시 하에 놓였으나, 그 자신은 마음에 두는 모습을 거의 보이지 않았다.

내가 아는 한에서 모든 과정을 거쳐, 그는 끝끝내 <고발>의 언어를 얘기하지 않았다. 그의 일체의 사고와 행동의 근원에는, 가열차고 압도적인 침묵만이 있었다. 그건 목소리가 되는 것으로 그 어쩔 도리 없는 진실이 일거에 상실되는, 고발이 되어 현현하는 것(顕在化)으로 인해 고발의 주체 그 자체를 붕괴시키는 듯한 근원적인 침묵이었다. 강제수용소란, 그러한 침묵을 압도적으로 인간에게 강요하는 장소이다. 그리고 그는, 일절의 고발을 준열하게 거절하는 자세 그대로 서는 것으로써, 마지막으로 남겨진 <빈 자리>를 고발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고발이 고발이기 때문에 황폐해지고 마는 것으로부터 궁극적으로 탈출하는 일은, 그저 이 <빈 자리>에 대한 고발에 달려있다.

바무르 지대에서 내몰린 상황 속에서 카노를 가장 괴롭힌 것은, 자동소총에 둘러싸인 채 행진이 단적으로 상징되는 가해와 피해가 동시에 존재하는 현실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또한, 누구나가 자신이 살아남는 것밖에 생각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이러한 뼈아픈 동존(同存)을 확실히 보기 위해서도 그는 비관주의자의 명석함을 필요로 했다.

아마도 가해와 피해가 대치하는 장소에서, 피해자는 <집단으로써 존재>일 수밖에 없다. 피해에 있어서 마침내 자립하는 것이 불가능한 자들의 연대. 연대에 있어서 피해를 평균화하고자 하는 충동. 피해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가해적 발상. 집단이기에 피해자는 잠재적으로 공격적이며, 가해적일 것이다. 그러나 가해의 편에 밀려난 자는, 가해에 있어서 단독적일 위기를 견딜 수밖에 없다. 사람이 가해의 위치에 설 때, 그는 항상 소외와 고독에 보다 더 가까운 위치에 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의 가해자가, 가해자의 위치에서 나아가서 탈락한다. 그 때, 가해자와 피해자란 비인간적인 대립 속에서, 처음으로 한 사람의 인간이 태어난다. <인간>은 항상 가해자 속에서만 태어난다. 피해자의 속에서는 태어나지 않는다. 인간이 자기를 최종적으로 가해자로써 승인하는 장소란, 인간이 자기를 인간으로써, 하나의 위기로써 인식하게 되는 장소이다.

내가 무한히 관심을 갖는 것은, 가해와 피해의 유동 속에서 확고한 가해자를 스스로에게서 발견하여 충격을 받고, 그저 홀로 집단을 떠는 그 <뒷모습>이다. 문제는 항상 인간 한 사람의 단독적인 모습에 걸려있다. 여기서는, 소외라는 것은, 더는 비참함이 될 수 없다. 오로지 단 하나의, 도달하게 된 용기의 증거이다.

그리고 그 용기가, 불특정다수의 무엇을 구해내는가. 나는 그 무엇도 구해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의 용기가 구해낸 것은, 그저 그 한사람의 <위치>의 명확함이며, 그 명확함만이 일체의 자립에 대한 보증이며, 아마도 비관주의자 일체의 내용일 것이다. 단독자가, 단독자로써 자기의 위치를 구해내는 것 이상의 축복을, 나는 생각해낼 수가 없다.

지금에서 생각하면, 카노 부이치란 남자의 존재는 나에게 있어 바꿀 수 없는 유일한 것이다. 그의 추억에 의해, 나는 시베리아의 기억은 겨우 구해졌다. 이던 부류의 인간이, 전후의 황량했던 시베리아의 풍경과 일본인의 마음 속을 지나갔다는 것만으로 그것들의 일체의 비참함이 구해진다고 느끼는 것은, 아마도 나 혼자뿐일지도 모른다.

추기

시베리아에서 귀환한 후, <도쿠다 요청 사건>의 증인으로써 국회에 환문되어, 쇼와 25년(1950년)에 자살했던 칸 스에타루 씨와 카노는, 한 때 카라간다의 수용소에서 같이 지냈다고하며, 칸 씨의 유고집 『말해질 수 없는 진실』(쇼와 28년=1953년, 치쿠마 서점 발행)에 다음과 같은 기술이 있다. [p.85–87] 마이즈루 상륙 직후, 카노는 다음 내용의 K란 인물이 자기자신임을, 나에게 확인해주었다.

그 때, 우리들의 수용소에는 K가 있었다. K는 교토 약학 전문대를 나온 어른스러운 인물로, 독일어, 러시아어, 에스페란토어를 능숙히 했다. K와 나는, 자주 러시아어 문법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그는 츠르케네프를 사랑하여, 항상 오스트로프스키의 희극을 품 속에 두엇다. 작업장에서는, 잠깐 휴식 중에도, 소비에트 신문을 잘라내어 읽고있었다. 어느 때, 나에게 이러한 것을 이야기했다. “나에게는, 아무래도 니체나 키에르케고르가 가장 깊은 영향을 준것 같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공산주의자가 되더라도, 그러한 과거의 사상적 경력을 간단하게 잘라낼 수 없겠지요”

K에게 나는, “학예동호회”를 위해서 에스페란토 어를 이야기해 달라고 부탁했다. K는 수줍어 하면서도 받아주었다. 나는 「에스페란토어 입문」이란 테마로 광고를 냈다. 광고를 냈다곤 해도, 작은 판자를 식당에 걸어놓은 것인 뿐이지만.

그 밤은 심한 눈보라였다. 저녁을 끝내고 사람 기척이 없는 추운 식당에서, K와 나는, 청중이 모일 것을 기다렸다. 그러나, 이야기를 시작할 예정 시간이 되어도 그로부터 30분을 기다려도, 청중은 하나도 오지 않았다. 나는 K에게 미안해했다. 그러나 K는 조용하고 평온했다. K는 그저 한 사람의 청중인 나를 위해서, 휴지로 덮은 수첩을 꺼내어 “에스페란토어 입문”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먼저 “나의 사랑하는 에스페란토어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를 나누어진 칸 씨에게 감사드립니다” 하고 서두를 두고서.

K의 얘기는, 매우 계통적으로 내용이 풍부했다.

1, 에스페란토어의 발생
2, 문법의 기본
3, 에스페란토 어의 국제적 의의
4, 일본에 있어 에스페란토어 연구의 역사
5, 에스페란토 어의 연구문헌

에 다달아, 두 시간 정도 K는 이야기했다. 마지막으로 괴테의 <들장미>의 에스페란토어 번역을 설명하며, <에스페란토가(歌)>를 두 번 노래해주었다. 시린 식당에 퍼지는 청명한 K의 소리를, 나는 “학예의 사랑” 그 자체라고 느끼었다.

그뒤로 잠시동안 K는 다른 수용소에 옮겨졌다. 떠날 때, 나에게 <들장미>와 <에스페란토가(歌)>를 써주었다.

이러한 아름다운 혼과 함께 있게 되었어도, 곧 떨어져야 하는 워엔노프레닝(포로)의 몸의 덧없음을, 그 때만큼 심히 느낀 적이 없었다.

카노가 에스페란토어를 배운 것은, 학생시대에 그가 가끔 찾아간 교토 남선사의 시바야마 센케이 선사의 영향에 의한 것이다. 도쿄의 부대(육군 노어교육부 고등과)에서 카노와 만났던 때의 최초의 회화는, 확실히 에스페란토어에 관한 것이었음을 기억하고 있다. 나 자신은 에스페란토어를 다소 이해했다.

카라간다에 이동후, 사람을 통해서 나에게 받은 카노의 연락문은, 전문이 에스페란토이어었던 것도 있었으며, 미말의 Mi preska[u] perdis esperon.(나는 거의 모든 소망을 잃었다)는 한 줄이 지금도 나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카노가 어떠한 형태로, 스스로를 공산주의자에 비했는지, 나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전술한 <강연> 동안, 카노는 같은 카라간다의 일본인 민간 억압자 전용의 수용소에 옮겨졌다. 아마도 거기서 중대한 좌절을 경험했던 것은 상상할 수 있으나, 구체적인 사실에 대해서 카노는 마지막까지 이야기하지 않았다.

귀국후 다음 해, 카노는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광기와 같은 심신의 혹사의 끝에 급사했다. 그는마지막까지, 스스로 휴식을 허용치 않았다.

『일상으로의 강제 日常への強制』(構造社、197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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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hihara NepuYo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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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Ashihara NepuYo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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