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 겸허함과 반지성주의 사이에서
움베르토 에코가 킨들 단말기와 책을 동시에 떨어뜨렸을 때, 가라타니 고진이 지구온난화를 음모론으로 격하시켰을 때, 조르조 아감벤이 마스크 착용을 생권력적인 격리로 환원시켰을 때, 나는 이루말할 수 없는 당혹감을 느낀다. 이 학문의 한 분야에 어깨를 바치고 있는 자들이, 과학기술이 오로지 진보만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는 이들, 인문학은 그저 호사가들의 신선놀음이라 비난하며 경험과학만을 신봉하는 이들의 먹잇감이 되고 싶은 것처럼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런 당혹스러운 때, 이 학문에 의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떻게 반응하면 좋은가?
마법 주문처럼 맥루한과 키틀러, 라투르를 소환해서 될 일이 아니다. 애초에 그들의 논의가 위의 인물들과 협조적일지는 제쳐두고서라도 말이다. 어쩌면 그저 내 안의 과학소년이 얼굴을 찡그린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왕절개 시술과 인큐베이터란 현대의학 없이는 태어나지 못했을, 태아 시절부터 사이보그였던 내가 거칠게 항의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성서의 욥기를 떠올린다.
욥기는 급진적으로 세계의 원리와 그 이해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그 급진성은 곧 양날의 검이다. 한쪽날은 어떤 사건들 앞에서 그것을 상벌로 – 즉 우리가 생각하는 직관적이고 단순한 도식으로 – 환원시키지 않고 우리가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어떤 법칙이 있음을 인정하고 또 받아들이는 겸허함이며, 다른쪽날은 우리의 모든 지식을 “하나님의 그것 앞에 무용한 것”으로 취급하고 반론자들을 “돌팔이 의사”라고 욕하며 이제 그만 입을 다무는 반지성주의다.
양날의 검에서 하나의 날만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일까? 떼어놓았을 때 그것은 검인가?(물론 그것은 사전적인 의미에서는 검sword이 아니고 도blade이긴 하다) 혹은 검만큼 잘 자를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