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2 — 하늘은 지상의 송사를 받아라
욥기는 너무나 너무나 흥미로운 텍스트다. 욥은 이스라엘에 살지않고 욥기에 나오는 인물들도 이스라엘인들이 아니다. 욥기가 모세적 인물이라고 추정되는 이유도 욥이 인간의 일반적 수명에 배는 사는, 신화적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런 욥은 죄지은 것이 없는데 고통을 받는다. 그가 지닌 가축이 죽고 그의 자식이 죽고 자기 몸도 피부병에 걸린다. 친구들도 처음 만났을 때는 그를 보고 슬퍼하지만, 욥이 이럴바에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게 좋았다고 말하자 반발하기 시작한다. 그가 무언가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는 게 아니냐, 속죄하라고 얘기한다.
그런데 이 지점이 중요하다. 욥은 법적인 용어들을 써서 신에 대한 한탄을 토한다. 그는 신이 없다거나 악하다고 하지 않는다, 그저 이 지상에서 신에게 대화하길 요구하고, 내 고통을 기록해줄 증인을 요구하고, 자기를 변호해줄 누군가를 찾는다.
이는 욥의 고난과 쌍을 이룬다. 하늘의 법정/의회에서 “사탄” 즉 “고발하는 자”에게 신이 먼저 욥을 보았느냐고 물었다. 즉 신이 고발하는 자에게 고발해보라고 말한 것이다. 고발자는 이 법칙에 맞게 이유를 내놓는다. 그에게 부를 줘서 그런 것 아닙니까? 그의 몸이 성해서 그런 것 아닙니까? 그리고 신이 명한다. 좋다, 그러면 그에게서 그것들을 빼앗아보아라.
( https://www.workingpreacher.org/.../commentary-on-job-11...
https://www.workingpreacher.org/.../commentary-on-job-231... )
욥의 우짖음은 곧 그가 야훼와 나란히 설 수 있는 새로운 법정을 요구한다. 영원히 기록될, 서적이 아니라 납조각으로 바위에 기록될 초자연적 증인과 전지하고 전능한 야훼의 행위에 반역할 초자연적인 변호인을 요구한다. 이것이 야훼의 분노를 부른다. 하지만 동시에 야훼가 그를 옹호한 친구들을 옳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감히 야훼를 대신해 그 법정에 서서 그를 대변하는 이들이 글렀으며 적어도 자신을 직접 부른 욥이 옳았다고 확인시킨다.
이 기묘한 법정은 오로지 그 존재여부만이 문제시된다. 욥이 옳았는가 글렀는가는 처음부터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가라타니 고진은 죽었던 아이 대신에 새로운 아이를 야훼가 내려준 것을 두고, 고대사회의 가부장제에서 처자식은 대체가능한 것에 불과하다는 전근대적인 의식의 산물로 치부한다.
그러나 그렇다면 같은 재산인 가축은 두 배였는데 자식은 같은 수인가? 똑같이 두 배로 늘어야 하지 않는가?
법적 언어와 시적 언어를 구사하며 종횡무진하던 텍스트가 왜 신의 선물을 찬양하는 욥의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는가?
이런 질문은 고진이 고대인의 세계를 증여로 압축한 것에 다시 의문을 낳는다. 믿는다는 것은 무언가 되갚아주기 때문에(등가교환) 하는 행위가 아니라고 했으나, 친구들은 무언가를 되갚아주기 때문에 믿으라고 한 것이 아니라 “신의 존재를 믿기에” 정당한 고통이 있다고 믿은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여기서 문제시되는 건 욥이 요구한 송사, 새로운 지상의 법정이다. 하늘의 법정에서 고발자 사탄에게 ‘욥은 보았느냐’라고 묻던 신이, 인간 욥의 울부짖음 끝에 폭풍을 두르고 지상으로 끌려내려온다.
지상의 법정에 나타난 신은 대답할 말이 없다. 그는 전지하고 전능하며 무엇하나 그의 의지를 거스를 것은 없다. 그러나 그는 그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했는지 아닌지를 말해주지 않는다. 오로지 이 세계의 장엄함과 욥의 한계만을 논한다. 그런 신에 앞서 욥은 이제 신을 보았으니 입을 다물겠다고 한다.
그는 “신의 응답을 들었기에” 납득해서 입을 다문 게 아니다. 인간의 법정은 천국의 법정의 집행이 얼마나 부조리한지 고발한다, 설령 천국과 그 지배자 신=자연의 섭리가 답하지 않을지라도.
더욱 흥미로운 점은 이토록 반역적인 텍스트가 어째서 구약 때부터 정경으로 받아들여져 내려왔는가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도 아니고, 이스라엘 인의 얘기도 아닌, 하늘의 법 집행이 옳지 않을 수 있음을 암시하는 텍스트가 왜 (가라타니 고진 말을 빌리면 세계종교가 아닐) 유대교 텍스트 안에 자리잡았는가?
같이 읽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