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력, 도구, 시공간
우울증을 앓게 되면서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는 과거에 생각보다 내 의지력이 꽤나 강했단 것이다. 의욕이 왕성할 때도 마감의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미뤄서 해치워버리는 타입이었기에, 나는 나 자신의 의지력이 그렇게 강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의지력 저하에 시달리다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여태까지 특별히 무언가에 집중하기 위해서 의식ritual을 치뤄본 적은 없었다. 이를 테면 방청소를 한다거나 명상을 한다거나 하는 준비 행위를 필요로 한 적이 없었고, 침대에서는 잠만 잔다거나 어떤 시간대에는 핸드폰은 꺼둔다던가 식으로 환경 조성을 한 적이 없었다. 물론 학원에서 남아 공부하기도 했고 독서실에 가기도 했지만, 제재가 없는 학원은 둘째치고 독서실에서도 반드시 음악을 들으며 공부했고, 침대 위에서도 배를 깔고 누워서 공부하거나 바닥에서 독서하거나 한 적도 많다. 지금도 딱 책상에 바른 자세로 앉아서, 라는 건 안 된다(나와 정반대인 부친은 이게 매우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나는 그런 걸 ‘의지’의 실천이라고 생각한 적 없었는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런 환경조성 없이 목표한 바를 달성했단 점, 마감의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미룬다고는 해도 ‘그 마지막’에 전력을 다할 수 있단 점에서 이미 어마무지한 ‘의지력’을 지니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은 마냥 늘어져 있는 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마냥 늘어져 있는 병에 걸려버렸으니, 이전처럼 몸에서 끌어오는 차력으로 밀어붙이는 방식이 아니라 다양한 도구를 이용해 환경조성을 하게 되었단 뜻이다. 이건 우울증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지만 — 우울증이 그런 측면을 강화했을 수도 있겠다 — 나는 원래부터 단기 기억력이 상당히 좋지 않아서 물건을 자주 잃어버리거나 특정 사물의 명사를 잘 기억해내지 못했다. 이것저것 방법을 시도했지만, 결국 가장 편한 것은 공간 여기저기에 포스트잇을 붙여놓는 것이었다. 방 밖을 나가기 전에 가져가야 할 것을 신발장 위에 써붙인다던가, 누군가에게 돌려줄 책이 있다면 책장 위에 써붙인다던가, 그런 식으로 (마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메멘토>의 주인공마냥) 포스트잇을 써서 붙이게 되었다.
<계몽주의 2.0>에서 철학자 조셉히스는, 이러한 필기를 단순히 외부 기록 장치로만 보지 않았다. 예를 들어 주판을 굴릴 때, 사람들은 실제로 연산을 하는 게 아니라 기타를 치듯이 특정한 패턴으로 손가락을 움직일 뿐이다. 그런 행동의 연장선상으로 보자면 필기란 외부 기억 장치라기보단 외부 연산 장치에 가깝다. 의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자기 통제가 잘되는 사람들은 보통 굉장한 의지력(will-power)을 실천할 능력을 지닌 이지, 그런 굉장한 의지력을 불러낼 일이 없도록 자기 삶을 조직하는 이는 아니라고들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착각이다. 오히려 그런 의지력은 결과물일뿐이다. 의지력을 실천해야만하는 상황을 피함으로써 자기 삶 속에서 의지력을 효율적으로 분배하려는, 개인들의 잘 짜여진 시도에 의한 결과물 말이다. — — Joseph Heath, Enlightenment 2.0, HarperCollinsPublisher ltd, 2014, p.317
<계몽주의 2.0> 의 문제 의식과도 조금 다르고, 또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안하지 못한단 점에서 비롯되기도 하지만, 어쨌든 조셉 히스는 이 책에서 의지력을 구체적으로, 개개인이 어떻게 외부에 위탁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나는 ‘공용공간’이란 도구를 이용해서, 행동-시간-공간을 통일시키는 방식으로 나의 의지력을 외부에 의탁하기로 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세수하고 반드시 공용공간의 TV 앞에서 게임을 한다. 15분~30분마다 게임을 포즈하고 방으로 돌아가 아침일과(세수하기, 방청소 등등)를 한다. 90분 정도 게임을 한 뒤에, 그 옆에 놓여진 쇼파에 가서 한 시간 동안 독서를 한다. 저녁을 먹기 전에는 시간이 허락하는 한 30분에서 1시간 30분 정도 산책로를 따라 산책을 하고 나서 식사를 하러 간다. 등등등.
물론 시간표를 짜서 행동하는 게 이번이 처음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공간과 시간을 완전히 일치시키기에는 항상 그만한 사적 공간이 부족했고, 또 컴퓨터나 모바일 때문에 집중력을 빼앗기는 일도 많았다. 무엇보다도 그 전까지 내가 짰던 시간표는, ‘벌거벗은’ 의지력을 최대한 보존하기 위한 것이 초점이 아니라, ‘벌거벗은’ 의지력을 최대한 써버리기 위한 것에 맞춰져 있었다. 휴식시간을 아예 안 둔 것은 아니었지만, 굳이 말하자면 부담을 질 수 있는 최대한 짐으로써 많은 결과물을 창출하기 위한 시간표였다.
따라서 현재의 생활은 2016년 이전의 생활보다 더 많은 결과물을 내놓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우울증이 심하던 때와 비교하면 훨씬 더 많은 일들을 하고 있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길고 긴 일기도 마찬가지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일이지만, 어떤 시간과 어떤 공간에 맞추어 특정한 여가를 즐기기로 했기 때문에, 그 남는 시간이 정말정말 지겹기 때문에 이런 글을 쓰고 있다. 오늘까지의 일을 곱씹어보거나 특정한 독자에게 읽히기 위해, 일기를 쓰기로 하는 시간에 쓰는 것이 아니라, 의지력이 충분히 남아있기 때문에 좀 더 높은 의지력을 필요로 하는 일을 소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반대로 ‘보상=노는 시간’을 특정 시간대로 미뤄버렸기 때문에, 그 시간 전에는 다른 걸 해두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차라리 잠이라도 잘 걸” 이라는 경우가 없어졌단 얘기다.
물론 이런 시간표만이 도구는 아니다. 우울증 약도 꼬박꼬박 먹고 있고, 적당한 산책을 하고 햇볕을 쬔다거나, 음식을 균형있게 규칙적으로 섭취한다거나(마지막 항목은 약간의 과장은 있지만 노력한다고 해두자), 그런 식으로 생화학적인 도구들도 사용하고 있으며, 이도 내가 우울증에서 원하는 상태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그래서 무슨 소리를 하고 싶었냐면 어… <계몽주의 2.0> 잘 읽었고, 앞으로도 잘 살아보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