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 — 시, 소설, 미싱링크
이상(李箱)의 소설 작품들을 연구할 때, 그의 사생활과 소설을 연결짓는 일을 지양할 필요가 있다. 이는 소박하게 저자와 작품을 분별해야 한다는 뉴 크리티시즘적인 제안이 아니다. 이러한 연구방법을 따를 경우, 그의 인생사 안에서 커다란 단절이 있지 않는 한, 그의 시와 소설에서 발생한 불연속성(처럼 보이는 것)을 설명할 수 없다는 자기모순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 미싱링크를 설명할 수 없다면, 그의 소설을 순진하게 ‘사소설’로 읽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자, 이제 구체적으로 시 작품과 소설 작품이 어떻게 다른지를 살펴보자.
이상의 시에 대한 연구는 많지만 대개는 이를 어떤 암호(시니피앙)로 보고 그 뜻(시니피에)을 풀이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보기에, ‘내용’보다는 ‘형식’ 혹은 ‘형식’ 스스로가 갖는 효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상의 시는 문학에 수학・건축학・해부학의 용어를 침입시킴으로써, 시라는 장르의 조건이나 한계를 재검토했다. 위와 같은 <과학적>인 언어로 음율을 만들어냄으로써 <문학적> 기반을 뒤흔들거나(오감도 시제1), 모홀리-나기적인 ‘역동학적 리듬Kinetic Rythme’를 활성화시키는 방식으로 <문학>을 사용하였다(건축무한육면각체).
한편, 이상의 소설은 “자연주의-연애소재-사소설”에 ‘의식의 흐름’ 기법 정도만 도입한 ‘안전한’ 작품들로 보인다. 일부 삽화에서 근대과학기술에 대한 논의를 펼치기는 하지만 그것이 중심이 된 경우는 거의 없다. 띄어쓰기를 하지 않은 구성에 대해 실험적이라고 이야기되지만, 당시에 띄어쓰기의 문법이 완전히 통일되지 않았던 점이나 일본어 경험을 생각할 때 아주 파격적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하지만 내러티브를 따라가다보면, 이상의 “사소설” 주인공들은 주체 성립 = 내면의 통일성 부여에 실패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날개」에서 주인공은 마지막까지 아내가 준 것이 ‘아스피린(마르크스)’인지 ‘아달린(맬서스)’인지 구분할 수 없다. 「지주회시」에서 ‘그’는 자신이 거미인 것을 알면서도 그래도 돈을 또 받고 싶다고 얘기한다. 「종생기」에서 ‘이상’은 결말에 이르러 문자 그대로 살아도 산 게 아닌 상태가 되고 만다.
특히 자주 회자되는 「날개」보다도 「지주회시」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주인공 ‘그’는 아내의 돈을 착취하는 것으로 자신의 생계를 이어가는 점에 대해 자기고발=고백=고해성사를 행하고 있다. 이러한 형식을 따름으로써 ‘그’는 가라타니 고진이 말하는 ‘내면’을 발견했다(『일본근대문학의 기원』 참조). 그렇다면 아내에 대한 ‘죄책감’ 또한 그 ‘내면’을 성립시키위해 발생한 대상화이며, 스스로의 주체화를 위한 이중적인 착취(경제적 착취 — 문학적 착취)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주체화의 방식이 자신의 아내를 착취하고 동시에 자신을 억압하는 오吳씨를 가해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거미는나밖에없다”라며 스스로의 ‘가해 행위’를 승인함으로써 ‘주체화’ 되었다는 점은 주목할만하다.
아마도 가해와 피해가 대치하는 장소에서는, 피해자는 <집단으로써 존재>일 수밖에 없다. 피해에 있어서 마침내 자립하는 것이 불가능한 자들의 연대. 연대에 있어서 피해를 평균화하고자 하는 충동. 피해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가해적 발상. 집단이기에야말로, 피해자는 잠재적으로 공격적이며, 가해적일 것이다. 그러나 가해의 편에 밀려난 자는, 가해에 있어서 단독적일 것인 위기에 견딜 수밖에 없다. 사람이 가해의 위치에 설 때, 그는 항상 소외와 고독에 보다 가까운 위치에 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의 가해자가, 가해자의 위치에서 나아가서 탈락한다. 그 때, 가해자와 피해자란 비인간적인 대립 속에서, 처음으로 한 사람의 인간이 태어난다. <인간>은 항상 가해자 속에서만 태어난다. 피해자의 속에서는 태어나지 않는다. 인간이 자기를 최종적으로 가해자로써 승인하는 장소는, 인간이 자기를 인간으로써, 하나의 위기로써 인식하게 되는 장소이다.
— 이시하라 요시로, <비관주의자의 용기에 대하여>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또 다시 돈 내음에 아내가 또다시 폭행을 당했으면 좋겠다며, 돈에 대한 욕망에 동요되며 끝난다. ‘회개’는 결국 이뤄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의 작품을 단지 그의 삶이 (왜곡되어) 반영된 사소설로 읽기보다는, ‘사소설’이라는 장르가 갖는 ‘내면’이나 ‘주체’의 한계나 조건을 재검토하는 작업으로 읽는 쪽이 일관적인 독해법을 가져오리라 생각한다. 또한 그럼으로써 독자에게 어떤 효과를 일으키기를 기대하였는지도 생각해보는 것이, 더 건설적인 연구방향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