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치로서 서사를 정의하기

Ashihara NepuYona
3 min readJun 5,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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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사를 “인간에게(혹은 그에 준하는 지적 존재에게) 특정한 효과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목적 아래, 여러 정보들을 편집하고 재배열하여 전달하는 장치”로 정의하고 있다. 이는 물론 기존의 정의인 “서사는 사건의 요소를 조직하여 인위적인 순서로 구성한 결과물”과 배치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기존의 서사에 대한 설명은 연대기적인 단순 나열과 인과성을 통한 구조화를 대립시키고는 한다. 나는 위의 설명에서 인과성이라는 것을 반드시 포함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특정한 목적과 특정한 효과란 문구를 삽입했다.

예를 들어 밑의 정보를, 문장 혹은 연속되는 이미지를 보았다고 치자.

① 한 여경이 떨리는 손으로 허리춤의 권총을 움켜쥔다.
② 어느 경찰서의 총기 관물함, 한 자리만 총기가 비어있다.
③ 개인 사물함에 사진이 붙어있고, 사진 위쪽에 “J&R, FOREVER LOVE”란 문구가 적혀있다.
④ 누군가의 손이 “FOREVER LOVE”란 문구에 붉은 펜으로 취소줄을 두 번 긋는다.
⑤ 장미가 꽂힌 도자기 꽃병이 산산조각 난다.
⑥ R위에 쳐진 취소줄에서 붉은 잉크가 내려와 여자의 얼굴에 번진다.

대체로 독자/관중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해달라고 묻는다면 “연인 J와 R이 있었다(②).이 둘은 이별을 겪었기에(④), 여경 R이 권총으로(①) 자살했다(⑤⑥)” 혹은 “연인 J와 R이 있었다(②). 여경 J는 배신을 당했기에(④), 권총으로(①) 연인 R을 살해했다(⑤⑥)”고 대답할 것이다. 조금 더 나눠 보면, 독자/관중은 ①의 여경은 ③의 사진에 쓰여진 J&R중 하나이며, ④로 보아 이 둘의 관계가 끝났으며, ②의 총기 관물함에서 권총을 가져왔다고 논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다. 또, 독자는 ⑤와 ⑥가 각각 총을 맞은 사람의 신체적 피해에 대한 은유라고 (미학적 지식으로) 추론할 것이다.

하지만 이 정보들은 ③④⑥의 묶음 외에는 논리적으로 그 어떤 연관성도 지니지 않는다. 여경이 총을 쏘았는지 아닌지도 모르고(그녀는 쥐기만 했다), 주어진 정보 안에서 ②에서 없어진 총기와 ①의 총기가 같은지도 모르며, 실은 ③와 ⑥의 사진이 같은 사진인지도 알 수 없다. 독자/관객이 받은 정보에서 ③는 사진 위쪽만을 가리키며, 아래쪽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에서 예상한 독자의 반응은 이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해달라”라고 묻는 점, 즉 이 사건들이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어 있다는 전제를 단 질문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다른 독자/관중은 그저 ①~⑥의 정보를 반복하거나, ③④⑥의 사건을 연결할 순 있으나, ①②⑤는 무관한 독립적인 사건들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다. 특히 이 사건들을 미스테리 장르에 속한다고 추측한 독자라면, 위의 문단에서 언급한 이유 때문에 ③과 ⑥의 관계를 의심할 수도 있다. 혹은 아예 “잘 모르겠다”는 대답도 할 수 있다.

즉, ①~⑥의 나열은, 협력적인 독자에게 있어서 사건을 낭만적인 감정을 지니도록(효과/목적), 특정한 정보들만을 골라와서(편집) 특정 순서로 보여준(재배열) 비극적 서사(장치)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③④⑥이란 논리적인 사건, ④⑤⑥에서 반복되는 붉은 이미지, ①④의 손이란 신체부위의 연결이 이를 돕기는 하지만 말이다.

특히나 ⑤의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연상하기 쉬운” 문화적 관습(미학적 지식)을 이용했을 뿐이며, 실제의 총성이나 신체적 피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⑤를 발포의 은유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①과 ⑥ 역시 인과적으로 인정할 수 없다. 따라서 서사가 장치로서 그 기능을 충실히 실행될 때, 즉 협력적인 독자/관중을 통해서 각 사건들이 일관성을 지니며 이를 낭만적 비극으로 느낄 때, 비로서 인과관계가 형성되는 경우도 충분히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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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Ashihara NepuYo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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