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론적, 우편적』 재독

Ashihara NepuYona
5 min readApr 10,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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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서 평가가 바닥을 치는 아즈마 히로키지만, 그의 『존재론적, 우편적』은 다시 읽어봐도 흥미롭다.

그에 따르면 서로 다른 네트워크(배송기계)가 서로 다른 속도로 정보를 전달하지만, 주체인 ‘나’는 그 여러 경로를 통해 받은 정보를 지금-여기로 집약하면서(현전하면서) 정보의 내력을 말소한다. 그러나 말소 과정에서 속도의 충돌 흔적이 남고, 그 효과로 사고불가능한 것, 망령, 하이데거처럼 말하자면 ‘양심의 부름’이 생겨난다. 따라서 사고불가능한 것은 오배송된 하나의 우편(라깡)이 아닌, 우편망 속의 복수의 망령이란 효과로 설명된다.

아즈마 히로키가 빌려온 표현들을 섞어가며 말해보자. ‘메타레벨’에 있는 ‘존재’와 ‘오브젝트 레벨’에 있는 ‘존재자’. 이 둘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메타레벨’과 ‘오브젝트 레벨’은 자기언급적인 발화에 의해 결정불가능한 경우가 발생한다(“나는 거짓만을 말한다”는 명제는 참일까? 외부 체계의 도움 없이 이 문장만으로는 결정할 수 없다). 이것을 이어주는 ‘무언가’를 하이데거는 존재로부터의 ‘부름’으로 보았지만, 어디까지나 ‘오브젝트 레벨’의 ‘현존재’라는 단일한 구멍을 통해서 연결된다. 아즈마 히로키는 이러한 후기 하이데거적인 사고를 클라인 병의 구조 혹은 부정신학 시스템이라고 부른다.

물론 이러한 부정신학 시스템 또한 ‘존재자’들인 우리의 의식이 있는 곳 = ‘오브젝트 레벨’에서 ‘메타 레벨’에 이르는 것, 즉 ‘사고불가능한 것을 사고하는 것’인 초월성을 가능케한다. 하지만 그로써 동시에 그 시스템은 ‘불가능한 것’을 철학, 언어 체계 내에 가두어버린다. 언어는 ‘메타레벨’에 있는 ‘존재’로부터의 ‘부름’을 전달할 수 있는 특권적인 ‘존재자’(‘존재의 집’)가 되며, 언어 외의 경로로는 ‘불가능한 것’은 접근 불가능하다. 즉, ‘불가능한 것’은 세계 내에 단 하나만 나타난다. ‘존재자-현존재-부름-존재’라는 경로의 단일성, 자기동일성이 보장된다. 클라인의 병의 구조는 안정화되어있다.

즉, 하이데거는 ‘메타레벨’과 ‘오브젝트 레벨’를 구별하는 구조가 실은 불안정하다는 것을 폭로하면서도, ‘결정불가능한 것=자기언급성’ 혹은 ‘현존재’, 그러니까 언어체계에게만 초월성을 부여하여 재안정화시킨 것에 불과하다. 라깡이나 지젝은 그 ‘현존재’를 주체가 결여한 무언가(대상a)로 확인함으로써 하이데거를 비판하지만, 단일한 초월성만을 인정한다는 점에서는 하이데거 = 부정신학 시스템의 계승자라고 아즈마 히로키는 판단한다.

그는 네트워크들의 속도 충돌 효과인 ‘망령’으로 ‘부름’을 이해할 때, 우리는 언어나 철학이란 단일체계를 특권화하고 폐쇄시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의식-주체가 현전하는 세계 자체가 불연속적으로 구성됨만을 확인한다. 어떻게? 외계(물자체)의 자극이 복수의 네트워크를 통과하고, 의식에 의해 그 내력이 말소된 채로 나타나지만, 어디까지나 그 자극들은 먼저 사물과 언어가 구분되지 않는 무의식에서 받아들이고 의식과 무의식이 겹쳐졌다가 떨어지는 주기, 리듬, 속도의 차이를 통해 구성된다. 의식은 기억하지 못해도 무의식은 기억한다. 그 사물과 언어를 경계지을 수 없는 영역에서 발생한 흔적을 (아즈마에 의한) 데리다는 에크리튀르로 정의한다.

하지만 여기서 나의 문제의식이 발생한다. 아즈마 히로키는 ‘주체의 경험적인 세계’를 뛰어넘는 ‘초월성’을 위해서 데리다를 읽는다. 지금-여기라는 경험적인 세계에서 다시 ‘존재’라는 단일한 초월성을 읽는 부정신학을 비판하고, 나의 경험적인 세계에서 먼tele 우편망 속에서 잠재적으로 발생할 속도들의 충돌효과, ‘망령’이란 복수의 초월성에 주목한 것이다. 즉, 그에게 타자는 ‘경험적인 타인’일 수 없다. 그렇다면 아즈마 히로키에게 ‘기계’로 표상되는, 더 정확히는 ‘배송기계’로 표상되는 네트워크의 물질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경험적이지 않고 잠재적 혹은 초월적인 것인가? 분명히 그것은 주체의 외부에 있으나, 경험적이고 구체적인 질료를 가진 사물들로 구성된 것이 아닌가? 펜이나 타자기 같은 미디어, 기계는 ‘경험 세계’의, 강하게 말하면 ‘경험론’을 바탕으로 한 ‘과학’이 관여하는 사물이 아닌가? 그런 경험적/과학적 세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 네트워크를 상정하기에 경험적이지 않은 타자가 탄생한 것 아닌가?

— 혹은 경험적이지 않은 타자를 탄생시키기 위해 억지로 네트워크로부터 경험론/과학적 세계를 분리시킨 것이 아닌가? 즉, 아즈마 히로키는 행방불명된 우편Dead Letter이라는 망령(효과)을 상정할 때, 경험적인 세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경험적인 세계를 아예 말소하는 것을 전제로 했다는 의심이 가능하다. 가라타니 고진의 ‘고유명’ 개념을 변형된 ‘현존재’로 파악하고 비판한 아즈마 히로키지만, 그럼으로써 타자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경험적이고 구체적인 타인이라는 가라타니 고진의 강조도 함께 부정될 때, 심증은 강해진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게임적 리얼리즘 :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2』이나 『일반의지 2.0』을 『존재론적, 우편적』과 연속적인 흐름으로 이해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거기서 포스트모던한 대중들은 “개구리가 노래하고 벌이 춤추듯이” ‘물질적’이지만, 대화하고 토론하고 투표하고 일하는 ‘구체적인’ 개개인들이 아니다(『동물화하는~』). 그리고 그런 개인들의 불연속적인 의식을 다시 현실에 안착시키기 위한 기법으로, 이 현실을 살아가기 위한 기법으로, 있었을지도 모르는 행방불명된 가능세계, 오배송, 혹은 망령들을 표현/대표할 것을 요청한다(『게임적~』『일반의지 2.0』).

하지만 “물리적으로 편지가 도착하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은 우리들의 경험 세계에서 비롯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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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hihara NepuYo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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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Ashihara NepuYo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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