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플러의 타원
칸트가 인용한 덕에 널리 알려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지만 그 오해는 상당하다. 먼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그 자체가 ‘대상에서 주관으로’ 라는 식의 칸트의 인식론과 정반대다. ‘사물이 붙박혀 있는 것이 아니라 주관을 중심으로 사물이 정립되는 것’이라는 설명부터 칸트의 인식론은 오히려 천동설적인 설명에 가깝다.
* “태양-신-실체가 붙박힌 게 아니라 천체-인간-주관들이 움직인다라고 본다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지동설적인 인식전환)으로 볼 수 있다는 지인 분의 조언이 있었다.
물론, 칸트는 어디까지나 현상은 같더라도 그것을 분석하는 방법을 완전히 바꾸는 전환(Revolution)을 일으킨 것에 주목하여 쓴 비유니, 이 같은 지적은 사소한 시비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 역시 — 임마누엘 칸트와 같은 대철학자는 아니다만 — 똑같은 비유를 써서 말한다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은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칸트가 반대한 경험주의와 그에 의한 축적 쪽이 훨씬 더 중요하다.
먼저 말해둘 것이 있는데,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한 이유는, 무언가 혁신적인 발견이 있어서가 아니라 아름답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우리가 지금 수학적으로 말하는 아름다운 식을 썼다는 의미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의미다. 오히려 지금의 수학적 용어로 표현하면 훨씬 더 지저분한 수식을 써서 지동설을 설명했다. 지동설의 대표로 일컬어지는 그와 갈릴레이 갈릴레오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였고, 자연의 운동은 완벽한 ‘아름다운’ 원을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지동설에게 결정적인 순간을 찾아오게 한 자는 요하네스 케플러였다. 케플러는 지동설을 지지하되, 원운동이 아닌 타원운동을 한다는 궤도 수정을 주장했다. 그는 지동설과 천동설의 중재적인 이론을 내놓은 티코 브라헤의 제자였으며, 브라헤의 관찰을 통해 얻은 자료를 통해 오차를 발견하고 궤도를 타원형으로 수정했다. 물론 이 또한 케플러가 내놓은 가설에 불과했으며, 케플러의 법칙은 나중에 뉴튼에 의해서 증명된다.
한편 케플러 역시도 ‘우주의 운동은 신의 완벽한 조화’라는 환상(혹은 믿음)을 만년까지도 버리지 않았다. 뉴튼 또한 신학에 열을 쏟고 연금술에 심취했으며, 중력의 원인을 곧 신이 관여하여 생기는것이라 믿었다. 지식·종교·정치의 분리가 근대의 조건(송호근, 『인민의 탄생』)이라고 할 때, 케플러~뉴튼 시기(17세기)까지도 여전히 ‘근대적인 과학자’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과학은 ‘완벽한 조화’라는 종교적 원리를 하나씩 깨뜨리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우리는 칸트에게 되물어야한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코페르니쿠스의 전환이 아니라, 케플러의 타원이 아니냐고. 진정으로 결정적인 순간은 전환의 국면이 아니라, 그 전환을 실제로 적용하고 오차를 발견하며 또 때로는 반대되는 의견도 총합하여 이뤄지는 궤도 수정과 그 증명이 아니냐고 말이다.
예를 들어 칸트 스스로는 ‘시간’과 ‘공간’ 개념에 대해 칸트는 좀 더 선험적(연역적)으로 접근했는데, 오히려 우리는 ‘케플러의 타원 궤도 수정’을 이용해 그 개념을 경험과학 — 뇌과학적인 방향으로 접근할 수도 있다. 인간과는 다르지만 복잡한 신경구조를 지닌 까마귀는, ‘당장 얻을 수 있는 저질 먹이’와 ‘조금 더 기다리면 얻을 수 있는 고급 먹이’를 주고 이를 선택하게 했을 때 후자를 골랐다. 즉, 그들에게는 ‘시간’ 개념이 확실하게 존재하며 또한 기계적인 본능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내적 갈등’이 존재하는 것도 알 수 있다. 또한 까마귀들의 경우 수학적으로 ‘0’ 의 개념을 이해한다는 실험도 있다. 즉, 선험적 주관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유전학적으로’ 몇몇 종에게 주어진 ‘상대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