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루엘라

Ashihara NepuYona
3 min readJun 6,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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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의 빈 건물에 사는 고아들, 벼랑 위에 세워진 대저택, 화려한 무도회장과 이를 주최한 잔인한 남작부인, 불운한 사고, 상속을 둘러싼 음모와 계략…

이렇게 얘기하면 18세기에 쓰여질 법한 고딕 범죄 소설 같습니다만, 2021년에 개봉한 <크루엘라>를 차지하는 큰 부분은 이런 구식의 이미지들입니다. <101마리의 달마시안>에 나왔던 모피광의 악마 크루엘라 드빌의 기원담을 다루는 이 영화는, 속을 뜯어보면 여전히 “현대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트레일레에서 과장되게 보여준 에스텔라와 크루엘라라는 두 페르소나는, 딱히 “진짜 내가 누구인지” 고민하는 근대적인 자아의 문제나,사회적인 환경에 의해 점차적으로 악에 물드는 과정의 문제로 이어지진 않습니다. 영화 안에서는 크루엘라가 본래부터 좀 또라이같은 성품으로 태어났다는 식의 묘사로 충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는 아주 고전적인 복수극이고, 동시에 또 고전적인 악한 소설들을 따라갑니다. 주인공은 물론 PG-13이라는 수준에 맞춰서 비교적 많이 호감가는 인물로 바뀌었고(정말로 사람을 죽이거나 개를 죽이고자 할 정도로 악하진 않습니다), 몇 가지 유치한 농담들이 오고가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여전히 복수에 눈이 멀고 권력에 굶주려 계략을 꾸미는 악당에 가깝습니다.

영화는 이런 18세기적인 구닥다리함을 화려한 스타일과 장르(패션쇼, 하이스트)로 메꾸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입니다. 거리가 있어 보이는 이 요소들을 묶어주는 접착제 역할은 70년대의 펑크락 테마가 담당하고 있습니다. 크루엘라의 원수인 남작부인이 고전적이고 우아한 패션을 대표한다면, 이에 맞서는 크루엘라는 당연히 더 반항적이고 충격적인 이미지를 연출해야하고 그것이 펑크락 스타일이란 식으로요. 이는 자연스럽게 후반부의 게릴라 쇼에 가까운 범죄 행위와도 연결됩니다. 뭐, 물론 진지한 정치적인 코멘터리까지는 가지 않고 ‘패션’ 요소에 가깝긴 합니다만.

저는 이게 꽤나 <배트맨 리턴즈>의 ‘정신적인 후속작’처럼 느껴졌습니다. 둘다 18세기 고딕스러운 테마에, 좀 더 현대적인 요소들을 가미했지만, 범죄와 악 속에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그리고 있거든요. 심지어 <크루엘라>에는 아예 팬서 드빌을 몰고 런던 거리를 종횡무진하는 카체이싱 장면도 있어요. 단, 위에서도 말했지만, <크루엘라>는 <배트맨 리턴즈>에 비하면 훨씬 훨씬 마일드하고 깊이가 얕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모든 면에서 더 밝고 더 화려하기도 하죠. 그리고 그저 비열할 뿐인 악당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눈 앞의 장애물을 걷어차는 걸 보는 것도 때로는 통쾌하거든요. 최근에 “슈퍼 빌런” 영화인 <조커>는 지나치게 동정적으로 수동공격적인 인물을 다뤘고, <할리퀸 : 버즈 오브 프레이>는 차라리 안티 히어로에 가까웠던 걸 생각하면, 그런 욕망에 훨씬 더 정직한 영화라는 점이 좋습니다.

★★★☆(Bad / So-So / Good / Gre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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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hihara NepuYona
Ashihara NepuYona

Written by Ashihara NepuYona

10.21hz : The Megalomainc Radio T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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