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al doji-ko problem

Ashihara NepuYona
6 min readMay 30,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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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도짓코라는 말이 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세상이라기보다는 일본이지만. 여하간 이 말은 실수하다의 속어인 ‘도지ドジ’에 그러한 사람이란 의미의 접미사 ‘-코-子’를 붙여서 만들어진 단어로, 한국어로 의역하면 ‘덜렁이’ 쯤 되겠다. 물론 이 단어는 일반적인 쓰임 이상으로, 오타쿠 문화에서 특정한 성격을 지닌 여성 캐릭터 타입을 지칭할 때 많이 쓰인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오늘도 또 저지른 실수들을 말할 때마다, 이 단어들을 떠올리곤, 동시에 매우 불쾌해진다. 한 가지는 나는 그런 미소녀가 아니라는 점에서 그렇고, 다른 한 가지는 도짓코로 오래 살면 그 스테레오 타입에 도무지 납득을 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나는 건망증이 있어서, 쉽게 여러가지 일과 물건들을 잊어버린다. 내가 잃어버린 교통카드만으로도 아마 손바닥만한 높이의 탑을 세울 수 있을 것이며, 최근에도 중요한 서류를 누락해서 급하게 공공기관을 오간 적도 있었다. 식당이나 대중교통에서 가방을 두고 오는 일은 예사다.내 작은 방 안에서도 안경과 지갑을 잃어버린다. 예의 그 특성에 해당하는 것은 건망증 뿐만이 아니다. 손매도 야무지지 못해 무언가를 엎지르거나 깨뜨리는 것도 빠지지 않는다. 나는 지금도 집에 등산용 스테인레스 컵 밖에 갖고 있지 않으며, 최근에도 몇 번인가 국 그릇을 바지에 엎지른 적이 있다. 어제인가, 사둔 아이스 커피 믹스와 그냥 커피 믹스를 헷갈려서 제대로 녹지 않은 커피를 찡그린 채 마시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삶을 오래 살면, 최소한 고등학생이 될 정도의 나이까지 살면, 아무도 이른바 ‘도지코’들처럼 사태에 대응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지 않으며, 나의 허무주의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자부할 수 있다.

아끼던 물건들은 말 그대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중요한 기회에 실수를 하거나 깜빡 잊어서 남에게 민폐를 끼치거나 후환을 만든다. 일상생활 속에서도 누군가 내게 그것이 틀렸다고 지적했을 때 당당하게 반박하기 힘들다. 내 기억이 틀렸을 수도 있으니까.

심지어 그건 내가 어떻게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어떻게 할 수 있었다면 부모는 둘째치고, 군대에서 선임들이 나에게 술 따르기나 고기굽기 시키기를 막지 않았을 것이다. “늘 두던 자리에 두라”는 말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데, 늘 두던 자리에 두려고 보면 그 아이템은 이미 없어져 있기 때문이다. 메모는 적당히 해두는 편이지만, 너무 열심히는 하지 않는다. 첫째로 그 메모장이 언제 없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며, 둘째로는 메모장에 너무 의존하면 건망증은 더 심해지기 때문이다.

나는 오타쿠 컬쳐에서 묘사되는 도짓코의 묘사가 현실 그대로를 사생하기보다는, 남성적 판타지에 충실하게 복무하는 ‘빻은’ 것임을 잘 알고 또 적극적으로 반대하기보다는 그러려니 생각하고 있다. 나는 이른바 ‘빻은’ 판타지도 어느 정도 공개 범위에 제한이 있을지언정 자유롭게 표현되어야 된다고 믿으며, 그런 남성적 섹슈얼 판타지에 열을 내기보다는 더 좋은 작품들을 소개하고 추천하는 것이 옳은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기분이 나쁜 건 기분이 나쁜 거다. 실수한 뒤에 울어버리거나 당황하는 도짓코에 대한 묘사는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다는 소리다.

글쎄, 그렇게 한 17년 이상을 살다보면 사람은 그에 적응하기 마련이다. 내가 도자기 컵 대신에 스테인레스 컵만 쓰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무언가를 엎지르거나 쏟아도 놀라지 않는다. 물론 기분은 나쁘다. 하지만 금방 일을 수습하는 방식을 찾는다. 물론 기분은 나빠지고, 때로는 지출도 늘어나며 그에 따라 소비 계획 중 하나는 그냥 훅 날아간다. 하지만 그것은 그냥 운이 나쁜 날일 뿐이고 짜증은 나지만 남들에게 보이진 않는다.

위에서 허무주의 얘기를 짓걸였지만, 이런 일상적인 영역에서 금방 체념하거나 포기하는 법을 배우게 되면 세계관 역시 바뀐다고 생각한다. 내가 어떤 것이 변하거나 사라지거나 영원하지는 않다고 생각하는 것도, 혹은 러셀의 칠면조처럼 혹시 내일 갑자기 지금까지 경험적으로 반복된 패턴이 깨질지도 모른다는 세계관을 갖고 있는 것도, 전부 그 때문은 아닐지라도 원인규명을 위해 그려진 원 그래프에선 그 부분이 분명 90도 이상으로 각도로 벌어져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도지코는 도지코다. 남성판타지에 복무하기 위해 연약하고 귀여우며, 미끄러지거나 넘어져서 하우우~ 소리를 내며 어린애 같은 반응을 보인다. 나는 이런 스테레오 타입을 접할 때 과연 이걸 만든 사람들은 이 캐릭터를 논리적으로 생각해본 적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노파심에 말하건데, 도지코에 대해서 불만을 품는 이유가 ‘입체적인’ 캐릭터 묘사를 원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한 가지 특징을 갖고 그에 대한 연쇄반응을 그려낼 때에, 논리적인 추론을 통해서 나올 수 있는 부분들이 생략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항상 물건이 깨지거나 망가지고, 툭하면 무언가가 없어지고, 내 기억과는 다른 사실이 남들의 입을 통해서 말해지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삶을 반복하면 어떻게 변하는지 생각을 안 해보는 걸까?

예전에 독서 캐릭터에 대해서도 불만을 늘어놓은 적 있지만, 독서 캐릭터의 이미지는 고전적이고 이지적이지만 동시에 부끄러움을 많이 타고 조용한 성격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거기에 자신감이 없을 때도 많고. 글쎄, 일본의 독서광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물론 독서광들이 비사교적이긴 해도 별로 조용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특히 인터넷 시대에 혼자 앉아서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적극성을 띠는 반사회적 행위에 가깝다. 따라서 그들은 낯을 가리기는 하지만, 그것은 사교활동에 자신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사교활동을 증오하는 것에 가깝다. 그들은 충분히 자아가 강하며, 자기 의견을 내놓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이야기할 수 있다. 조근조근한 사람이라도 분명하고 현란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편이다. 그건 ‘독서’라는 행위에 대해 논리적으로 한 번만이라도 생각하면 알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픽션에서 ‘일면적인 캐릭터’에 불만을 갖는 것에 대해서, ‘입체적인 캐릭터’를 만들기를 요구하는 것이야말로 사태를 일면적으로만 보고 있다, 고 생각한다. 때로는 일면적인 캐릭터들이 다양하게 등장하는 편이, ‘입체적인 캐릭터’ 혼자서 이야기를 이끄는 것보다 훨씬 더 작품을 입체적으로 만들어준다. 그들 ‘일면적인 캐릭터’들은 일종의 개념이나 상징이 되며, 그 개념이나 상징들의 상호작용이 더 높은 복잡성을 낳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 개념이나 상징들이 논리적으로 탄탄해서 서로 맞부딪칠 때 커다란 충돌이 발생해야 한다. 물에 술탄듯 술에 물탄듯 논리가 어물어물하면 상호작용도 딱히 흥미롭지 않다.

실재하는 도짓코 문제는 그런 점에서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음미해봄직 하지 않을까.

이 긴긴 글이 결국은 무슨 소리냐고?

오늘 내가 핸드폰을 한 손으로 들고 보다가 놓쳤고, 핸드폰은 한 서 너번의 공중제비를 돌더니 바닥에 전면부를 향한 채 낙하했으며, 액정이 깨져버리는 바람에 이걸 교체하는데 7만원을 들인 게 억울하단 이야기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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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Ashihara NepuYo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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