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uri・Parody・Yuri(한국어판) ②
『<harmony/>』&『청년을 위한 독서클럽』
“어째선지”・“백합처럼”・“진홍의 장미와 사탕과자” ②
『하모니』가 설정하는 “생명주의”사회는, 그 가치관을 강제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내면화시킨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무엇이든지 ‘내면화’시키는 것이 생명주의의 전략이다. 그것은 건강감시 시스템에 의해 문자 그대로 체내에 삽입되는 나노머신에서부터, 그 감시결과를 공표해 지역단위의 구성원들에 의한 유저평가 “사회평가점”에 의한 지배에까지 이른다. 그 프로세스는 “모두에게 힘을 조금씩 분할한 나머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될 정도의 탈중심화와, 각 개인에 의한 내면화로 성립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개인의 몸이 직접적으로 공공의 것이 된다. 즉, 『하모니』의 세계에서는 “생명은 신의 소유물에서, 모두의 소유물로 모습을 바꿔”, 신이 모두 안에서 조금씩 분할되어 존재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보면, 공항의 묘사에서 “권력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것은, 권력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너무나 보편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리라. 『하모니』의 세계의 토대는 미셸 푸코가 논한 생권력의 문제나 지그문트 바우만이 주장한 액체 근대이겠으나, 이 글에서는 거기까지는 다루지 않는다.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러한 종교적 — 특히 기독교적으로 비유되기 쉬운 생명주의의 가치관이, “어째선지” “백합처럼” 보이는 미션스쿨을 상기한다는 것이다.
동아시아에서는 근대 여성교육시설이 미션스쿨로 탄생한 경우가 많다. 물론, 미션스쿨이 여성교육시설만을 의미하지도 않으며, 모든 여학교가 미션스쿨도 아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에서도 많은 여자대학이 이러한 근대초기에 설립된 사립학교에서 발전되었으며, 일본도 이른바 아가씨 학교가 그러한 경향이 많은 것은 분명하다. 즉, “어째선지” “백합처럼” 인식되는 여학교 미션스쿨에는 이하와 같이 세 특징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첫째, “근대적인 교육시설”일 것. 둘째, 그것이 “여성을 대상으로 할 것”. 마지막으로 “종교적인 색채를 띠고 있을 것”이다. 이 세 특징은 개별적으로 “어째선지” “백합처럼” 보이는 이미지를 형성한다기보다는, 서로가 강하게 결부됨으로써 그 이미지를 형성한다고 본다.
이 세 가지 특징에서 먼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근대교육이 갖는 감시/관리시설로서의 성격이『하모니』의 감시사회와 연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미셸 푸코가 연구한 테마로, 여기서는 짧게만 정리해두자. 근대의 감옥은, 다수의 수형인을 처벌할 뿐 아니라 재사회화하는 훈련을 행하는 장소였으며, 그를 위해 효율적인 관리가 필요해졌다. 하지만, 이 “훈련”과 “관리”의 측면은 감옥뿐만 아니라, 근대의 교육시설에서도 도입되고 있다. 예를 들면, 테스트에서 학생들 뒤에서 감시하는 선생은, 수형인들이 감시의 시선을 직면하는 게 아니라 내면화하는 ‘판옵티콘’과 같은 원리로 학생들을 관리하고 있는 것이다.
『하모니』는,이러한 시선이 존재하는 것만을 그리는 것을 넘어서, 그 시선의 내실을 독특하게 설정함으로써 다른 감시사회를 묘사한 작품들과 차별화에 성공하고 있다. 공항의 묘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하모니』에서는 기독교와 생명주의를 비교하는 곳이 많다. 그것은 두 가치관의 차이를 손쉽게 이끌어내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지만, “수녀에 의한 정치”나 “자비로운 어머니에 의한 파시즘”이란 작중 표현에 까지 이르면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즉, 『하모니』에서는 기독교에서 “자비로운 어머니”나 “성모”로 묘사되는 모성에 의한 감시가 행해지고 있다. 이것을 여학교 미션스쿨의 나머지 두 특징 “여성을 교육대상으로 하”며, “종교적 색채를 띠는” 것을 보조선으로 해서 보면, 그 성격이 더 명확해진다.
지금도 그러한 경향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하긴 힘드나, 근대교육에 있어서 여성은 남성과는 다른 방향성을 요구받은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면, 1930년대 조선에서 어느 여학교의 교육방침에는, 총독부의 취지를 따르는데다가 “국가의 중견주부”로 학생들을 육성할 것이란 표현이 나온다(최성희, 『근대조선의 중등교육近代朝鮮の中等教育』를 참조). 이것은, 여성에 대하여 교육이 졸업후 진학보다도 결혼을 목적으로 행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주부”라는 사실을 전제하는 일은 당시 식민지 조선만의 일이 아니라 제국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그렇다면, 근대적인 “여학생”들이 “예비주부”로 내면화해야 했던 시선이나 가치관이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우리들이 논의하는 미션스쿨에 한정해 말하자면, 그녀들의 관리자인 수녀들의 시선과 그것이 대변하는 종교적 가치관이었으리라. 바꿔 말하면, 육체적으로는 영원히 순결한 처녀이면서도 정신적으로는 가정을 관리하고 아이들을 보호하는 어머니 — 성모 마리아와 같은 존재가 되는 일이 여학생들에게 요구되었다. 여기서 “보호하는 어머니”라는 역할은, 구약성서에서 발견되는 “처벌하는 아버지”로써 하나님과는 대조적으로, “주부”로서 가내의 경제를 관리하며 인적리소스를 재생산하고, “처벌”과는 다른 “복지”를 담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교육대상에게 요구되는 미래의 모습이, 동시에 지금의 감시자/관리자인 수녀들에게도 요구되는 이상적인 모습이란 사실도 중요한 포인트다.
이러한 체계가 세계 단위로 전 구성원에게 이뤄지며, 누구나 졸업하는 일 없이 그 생활을 계속한다면, 여기서는 감시자와 감시대상의 구분이 불가능해질 것이다. 『하모니』 의 세계가 바로 그것이다, 라는 것이 나의 해석이다.
실제 상황에서는, 학생들이 교육방침에 따를 뿐인 로봇이 아니며, 수녀들도 자비로운 사람들만 있던 것은 아니리라. 교육을 받은 근대의 여성들이 ‘모던 걸’이 되어 ‘현모양처’ 이념에 위협이 되었다는 사실이나, ‘여성다움’을 나타내는 행동거지가 여학교 내에서가 아니라 남녀공학에서 더 빈번하게 발견된다, 즉 남녀공학에서는 여학생들이 교내에서도 ‘여장’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지적도 존재한다. 그것을 고려한 위에서 하나 더, 근대적인 “여학생” 이미지와 『하모니』의 회상장면을 비교해보자. 여학교는 “주부”가 되기 위한 교육이 이뤄졌지만, 그 교육기간은 거꾸로 “주부”라는 역할이 주어지기 전까지 제한된 유예기간이기도 했다.
요시야 노부코 시대에는, 여학교란 “결혼”까지 도피처이며, “결혼”이란 대체로 어쩔 수 없이 부모로부터 강요당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소녀들은, 그 “결혼”까지의 한정된 시간 속에서 유일하게 스스로가 자유롭게 고를 수 있는 사랑, 즉 여자들 간의 사랑의 판타지를 찾아, 그것을 음미했다.(후지모토 유카리,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中. 강조는 원문을 따름.)
『하모니』의 세계에서는, 어린이들은 아직 성장하고 변화하기 때문에, 항상성을 전제로 하는 “WatchMe” 시스템을 몸에 삽입하는 것이 어른이 된 뒤로 설정되어 있다. 그 안에서 “진홍의 장미와 사탕과자”로 미아하와 투안이 만나, 유예기간 동안 함께 자살을 시도한 것이다. 이 관계는 동경이나 병사들의 연대와 같이 로맨틱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으나,반대로 그런 감정이기에 “우정”으로도 “사랑”으로도 보이는 애매함을 획득하고 있다. 참고로, 『하모니』의 작가 이토 게이카쿠는, 이 책이 나오기 전에 자신의 블로그에 소개할 때 이상할 정도로 “백합”을 언급하고 있다.
“스스로 말하기 뭐합니다만, 조금 백합스럽습니다”
(https://projectitoh.hatenadiary.org/entry/20081018/p1)“여자를 주인공으로 한것은 백합스러움이나, 여자들이 모여 불온한 짓을 하고 싶어하는 게 쓰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https://projectitoh.hatenadiary.org/entry/20081208/p1)“테마는 백합입니다. 여성판 타일러 더든과 붙어서 노닥거리는 주인공이 포인트입니다”
(https://projectitoh.hatenadiary.org/entry/20081214/p1)
흥미로운 것은, 어떤 문장에서도 “백합”이 아니라 “백합스러운” 것이라고 적고 있는 점이다. “장르는 백합”이 아니라 “테마는 백합”이라고 선전하는 것도 그렇다. 이것은 데뷔 전부터 나이브한 청년남성을 주인공으로 한 작자가 자신이 없음을 표시한 발언으로도 읽히지만, 동시에 『하모니』가 “백합”을 다루고 있을 뿐 “백합”이 아니란 사실 — 이 글에서 말한 “백합의 패러디”임을 자각한 발언이라고 본다.
오발탄에 의한 범행
백합의 성질을 탐구한다는 이 글의 목적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두 작품이 설령 “백합의 패러디”라고 하더라도, 그것들이 “어째선지” “백합처럼” 생각되는 기존의 이미지나 나아가 “백합” 장르에 가져온 효과가 무엇이었는지 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두 작품에 대하여 고찰의 범위를 벗어난 비평 — 좋은가 나쁜가에 대한 판단 — 을 시도해보고자 한다. 단, 여기서 판단기준은 어디까지나 “백합의 패러디”라는 조건을 달아두자. 나는 『하모니』나 『독서클럽』이 “백합”이나 “백합의 패러디”로만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애초에 “백합의 패러디”가 되는 것이 두 작품의 최종목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단 많은 논점을 이 글에서는 회피했던 것처럼, 다른 기준에 의거한 비평은 하지 않는다.
자, 결론부터 말하자.
나는 “백합의 패러디”로서 『독서클럽』을 『하모니』보다 높게 평가한다. 그러나, 어느 쪽도 크리티컬한 패러디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어째서 그렇게 평가하는지 지금부터 설명하도록 한다.
먼저, 『독서클럽』 부터 시작하자. 전편에서 적었듯이, 『독서클럽』은 「가라스마 베니코 연애사건」에서 가부장제를 옹호하는 듯한 결말을 그리고 있으며, 백합 팬에게는 불만스럽게 생각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동시에, 그렇게 결론짓기에는 다양한 반례가 작중에서 확인되고 있다. 어째서, 하나의 작품에 이토록 다양한 측면이 나타나는 것일까.
그것은 『독서클럽』이 어느 공동체의 짧지 않은 역사를 기록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1919년 ‘성 마리아나 학원’의 설립으로부터 딱 백년 뒤인 2019년에 남녀 공학이 되는 것으로 끝난다. 상관 없는 이야기다만, 이 책은 2007년에 발간되었기에 2009년을 배경으로 하는 네 번째 에피소드로부터는 미래의 이야기다만, 그래도 여전히 헤이세이가 끝나고 레이와가 시작되는 해, 2019년에 ‘성 마리아나 학원’이 여학교로서 아이덴티티를 상실한다는 내용은 필자에게 의미심장한 징조처럼 다가온다.
다소 돌발적이지만, 『독서클럽』 속에 반복해서 나오는 문장을 지적해두고자 한다. 그것은 ‘소녀들의 폐쇄적인 낙원’으로서 ‘성 마리아나 학원’은 세간과는 관계가 없다는 표현이다. 예를 들면, “그러한 시대의 흐름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바깥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학원은, 그리고 그 중추인 학생회는 흔들림이 없었다”, “바깥세상 사람들의 눈에 학원은 변함없이 하늘하늘한 비단 베일에 쌓인 것처럼” 등등. 하지만, 실제로는 분명히 바깥 세계와 연동하고 있으며, 특히 독서클럽의 클럽지에 쓰여진 일은 그러한 역사의 산물이다. 예를 들면 1918년에 유행성의 감기에 걸린 미셸을 대신하여 성 마리아나가 죽고, 그 미셸이 일본에 가서 성 마리아나 학원을 세우게 된다. 이 1918년에 유행한 감기라고 한다면 “스페인 감기”를 가리키는 것이라. 첫번째 에피소드인 「가라스마 베니코 연애사건」은 가라스마 베니코가 암흑무도를 보러 갔다가 만난 불량 공장 노동자의 존재가 없었다면, 결말은 똑같지 않았으리라. 그리고, 그사건이 발생한 것이 1968년. 동시대의 전공투세대나 그들의 언더그라운드 붐과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에피소드 「기묘한 여행자」에서 행해진 학생회 혁명에 이르러서는, 1980년대의 버블과 관계 있다고 화자가 명언하고 있다. 거꾸로, 이후 (발간당시의 시점에서) 미래의 에피소들은 반복해서 “저출산”문제가 그 배경으로 등장한다. 이것은 나의 억측이긴 하나, 2009년을 무대로 한 에피소드 「초저녁 별」은, 독서부원이면서 교내 락스타가 된 야마구치 주고야의 이야기로, 2000년대에 일어난 걸즈밴드 붐을 기반으로 쓰여져 있는 것 아닐까.
이야기의 방향을 2019년이 배경인 마지막 에피소드 “관습과 행위”으로 틀어보자. 이 에피소드에서 마지막 부원 “사미다레 토와(五月雨永遠)”가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이를 그녀 개인의 이야기로 읽기에는 어딘가 걸리는 부분이 있다. 예를 들면, 교무실에 자주 드나드는 그녀가 가벼운 기분으로 학생들의 압수품을 훔쳐 돌려준 행위가, 고전 문학 『붉은 별꽃』에 나오는 의적의 이름을 빌린 “부겐빌레아 님”으로 불리며 그 가상인물에 ‘성 마리아나 학원’의 학생들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는 전개는 너무나도 「가라스마 베니코 연애사건」과 닮아있다. 게다가 그녀의 외견묘사는 가라스마 베니코 연애사건의 중심인물, 세노 아자미를 연상시킨다. 그것뿐 아니라, 그 아자미가 보수당의 국회의원으로 학생들 앞에 나타나기까지 한다. 여기에다가 이름은 사미다레 토와, 즉 ‘영원’이란 뜻이다. 이렇게 보면 독서 클럽의 마지막 부원이라기엔 너무 잘 만들어져있다. 그녀는 개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지금까지 존재한 독서클럽 부원들의 콜라쥬에 가까운 존재다.
결말에 밝혀진 진실에 다르면, 이 이야기를 기록한 것은 사미다레 토와도 아니고, 그 사미다레 토와로부터 독서클럽지를 건내받은 세노 아자미도 아니고, 그녀들의 사정을 들은 익명의 인물이다. 우리들이 상상력을 발휘하면, 익명의 인물이 들은 사정대로 성실하게 기록했다고 믿더라도, 그 일이 세노 아자미의 창작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증거는 발견할 수 없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런 서술 트릭의 진위를 따지기 위해 이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다.
마지막 에피소드가 주인공들이 아닌 타인에 의해 이중, 삼중 구조로 이야기된 이유는, 『독서클럽』과 독서클럽지가 “그녀들의 역사”로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독서클럽지는 사미다레 토와 개인의 것이 아니라, “관습과 행위”라는 독서클럽 출신자들이 경영하는 카페의 것이 된다. 거기서는 마치 동화 속 마녀와 같은 모습이 된, 과거의 독서클럽 부원들이 모여있다. 이 “관습과 행위”는, 말할 필요도 없이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논문 “구조, 관습(하비투스), 실천”으로부터 인용한 것이리라. 하비투스의 개념이 사회적인 조건이나 학습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서술의 다중구조는 역시 ‘성 마리아나 학원’같은 미션스쿨이 사회와는 고립된 ‘소녀들의 폐쇄적인 낙원’이 아니란 사실, 그리고 그것이 그녀들에 의해 공유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
우리들의 논의와 관련지어 말하면, “어째선지” “백합처럼”생각되는 미션스쿨의 이미지를 빌리면서도 『독서클럽』은 각 시대를 살아간 역사적/사회적인 존재로 “소녀”들을 그리고 있으며, 불량 공장 노동자나 미셸과 같은 작중 “남자의 존재”는 그러한 바깥 세계와의 연결을 암시하기 위한 실마리가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독서클럽』은 독자의 기대를 배반하면서도, 그녀들이 지낸 나날이 학교 안에서만 허용되는 한 때의 청준이 아니라고 표현하고 있다. 등장인물들은, 소녀가 아니라 노파의 모습으로, 다시 등장하는 것이다.
여기서 보류했던 문제를 다시 끌고 오고자 한다. 후지모토 유카리와 이 서는, 어째서 백합이 쉽게 비극이 된다고 봤는가. 후지모토에 다르면, 소녀 만화의 욕망은 “타자에 의한 자기긍정”에 기반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여자”라는 부호는 마이너스의 성질을지니며 “”(자신이 사랑한) 남자에게 사랑받는다”는 것으로만 여자는 자신의 성을 긍정할 수 있다”(강조는 원문에서)고 전제한 뒤에, 남성과의 로맨스로 극적인 반전이 일어남으로써 승인욕구를 채우고 있다고 설명한다. 즉, 그러한 남성과 같은 권위를 갖지 못한 여자로부터 사랑받는 일은, 소녀만화 관계자들에게, 반사적으로 ‘현실’을 상기시켜서 비극으로 내달리게 했다는 것이다. 작자의 말을 빌리자면
그것은 이 남성사회 그 자체에 의해 새겨진 존재의 불안, 게다가 그것을 구할 수 있는 것은 남성밖에 없다는 착각이란 교묘한 지배의 구조를 떠올리게 한다.
이 서의 분석도 이와 멀리 있는 것은 아니나, 그는 더 역사적으로 생각하려고 한다. 이 서에 따르면, 근대의 동아시아에서 자유연애란 개념 그 자체가 새롭게 수용된 것이었다. 예를 들어, 나쓰메 소세키가 “연애감점恋”이나 “사랑愛”이란 표현을 쓰는 대 신에 직접적으로 “러브ラブ”라는 영어 표현을 쓴 일 등도 연애의 개념이 정착하기 전의 산물이다. 이것은, 동성애에 대해서도 사정이 같다. 가문끼리의 결혼이 아닌 “자유연애”란 개념이 없다면, 서구와 마찬가지인 “동셩애”란 개념도 존재하지 않는다.일본에서 근대적인 동성애가 특히 “여성끼리의 것”으로 인식되어, 예를 들어 1930년대 성과학자인 야스다 도쿠타로는 “헌데 요즘 신문의 사회면을 보자면, 어찌나 여자들 간의 동성연애 동반자살心中이 많은지. 마치 동성애가 작금에는 여자들에게 독점되고 있는 듯하다”고 적고 있다. 그것은, 일본이라는 프레임을 통해서 다양한 근대적 개념을 수입한 조선이나 대만에도 똑같이 적용되어, 이 씨는 여기서 개념을 일반적인 의미의 “동성애”와 구별하여 “동성연애”라고 적고 있다. 인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동성애 자살이 유행했던 것도 마찬가지로 대체로 여성에 의한 것이라고 인식되었다. 그리고 특히 나중에 이성애가 서구와 같이 “정상적인 것”으로 인식되기 전까지는, “불순한 이성 교제”는 여학생들의 순결을 위협하는 금기로 다뤄지지만 “동성연애”는 “교내”에서는 허용되거나 권장되기까지 했다(이상의 논의에서 이 씨는 Gregory M. Pflugfelder. “S” is for sister : Schoolgirl intimacy and “same sex love” in early twentieth-century Japan. Babara Molony, Kathleen Uno. “Gendering Modern Japanese History”.Harvard Univ Press. 2005.를 대거 인용하고 있음을 밝힌다).
“백합”이란 장르는 그 시기의 기억과 강하게 결부되어 있어서, 그것을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재현하며 현대의 백합물도 근대의 동성연애 동반자살을 트레이스하는 “한 쪽이 사라지거나 죽는” 결말이 발견된다고 이 씨는 주장한다.
설령 다른 학생들이 그들을 기억하더라도, 남겨진 이들은 약간의 노스텔지어를 가진 채 그 시간을 바라보면서 회상에 젖을 뿐이다. 위험했던 열정은 빛나던 한 시절의 추억 속에 안전하게 봉합된다. ‘그녀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여기서, “독서클럽”의 연대기적인 성격은, 그러한 문제에 대한 대답으로 볼 수 있다. 등장인물들이 살아가는 세계는, 교내에서 아자미가 만들어낸 “안전하고 화려한 스타” “왕자”와 “그 누군가”의 동성연애 롤플레잉을 반복하는 공간이 아니다. “여자”는 “육체”라고 생각하는 베니코는, 그 “여자”로서 자신을 긍정하기 위해 ‘성 마리아나 학원’과 결별한다(불량 공장 노동자의 존재는 언급되나, 그의 시점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등장인물은 언제나 “여학생”이지도 않으며, 늙어서 그 모습이 “요괴 같은 노파”가 되더라도 독서가로서 삶을 계속한다. 또한, 동성연애가 중심이 되는 에피소드 「초저녁 별」이 발간 당시로서는 미래인 2009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한 쪽이 죽거나 사라지는 엔딩이 아닌 이야기로 끝마쳐지는 점도 새로운 희망으로 읽을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백합의 패러디”로 “어째선지” “백합처럼” 생각되는 요소가 갖는 의미를 적극적으로 이용해 새로운 전개를 보여주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그것은 「초저녁 별」의 등장인물들이 작중에서 2019년 시점에서 “노파”의 동료가 되기엔 무리가 있다손치더라도, 그녀들의 그 뒤가 명확히 기록되지 않았기에 교외에서 동성연애가 갖는 의미나 역사성을 적극적으로 보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는 『하모니』는 『독서클럽』보다도 실망스럽다. 『하모니』는 “백합”을 기대한 독자들을 배반한 것은 좋았으나, “진홍의 장미가 죽는” 결말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물론, 이 전개는 일반적인 패턴과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인다.두 사람의 동성연애 동반자살이 학생시절에 이미 이뤄졌으며, “진홍의 장미” 미아하의 죽음이 “사탕과자”일 투안에 의한 살해로 되어있다. 그것을 두 사람이 “진홍의 장미와 사탕과자”의 관계로부터 해방된 표현이라고 평가하여, “어째선지” “백합처럼” 생각되는 진부한 전개로부터 빠져나왔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러한 주장보다는, 투안의 의식이 완전한 하모니에 들어가는 것으로 이 세상에 녹아내린 결말로부터 “동성연애 동반자살”을 다시금 트레이스하고 있다고 보는 게 합당하리라. “백합”을 테마로 하고 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백합스러운” 결말이다. “성숙이 불가능한 테크놀러지”를 테마로 하여, “사회의 상황이 첨예화한 끝에, 감정조정 등의 테크놀러지가 표상으로 출현한다”는 작자의 전략(http://www.sf-fantasy.com/magazine/interview/071101.shtml)에서 이를 비판한 것을 고려해도 그렇다.
『하모니』는 분명 세계를 거대한 미션스쿨로 만들어내어, 이를 디스토피아로 묘사하는 것으로 비판하고 있다. 또한, 그러한 세계가 가능하도록 한, 지금의 경향이나 기술의 연장선에 있는 가공의 테크놀러지를 그리고 있다. 그러나, 그 “자비로운 어머니”가 “어째선지”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한 의식은 엷다. “소녀의 뺨으로 뒤덮인 군대”, “어느 생부 의료군도 핑크 색인가 하는 당신, 그 말 그대로”하는 식의 묘사는, 그 “모성”을 지긋지긋하게 생각하는 감정은 전달되지만 어째서 그것이 “소녀의 뺨”으로 나타나는지 딱히 설명하지 않는다. 공공적인 리소스로 개인의 신체가 관리되고 있다면, 이 세계에서는 (재생산이 불가능한) 동성애자에 대한 취급도 달라지리라고 생각한다만, 그에 대해서도 특별히 언급은 없다. 이 작품에서는 나치독일의 여러 경향을 언급하면서도, 그러한 젠더 폴리틱스에서 대해서는 전혀 다루지 않고 있는 것이다. 다른 측면으로부터 비평을 하지 않겠다, 고 말했지만 이 점에 관해서는 어느 요소를 외삽하여 시뮬레이션하는 SF적 상상력으로 봐도 맹점이란 점을 지적할 수밖에 없다.
Conclusion ~ 흔적기관을 좇은 탐정으로부터 전언 ~
이 글은, 독자가 백합의 성질에 대한 이해를 깊이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여졌다. 하지만, 그 성질이란 것이 언제나 일관적인 것은 아니다.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진홍의 장미와 사탕과자”가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다는 요소는 백합물 속에서 이미 과거의 유물이 되었다. 또한, 『하모니』는 2008년 발행,『독서클럽』의 경우에는 2007년으로 이미 10년 전의 과거의 작품이 되었다.
예를 들면, 만화작품 『나의 백합은 일입니다!』에서는, 타이틀 그대로 “백합”을 연기하는 것이 셀링 포인트인 컨셉 카페가 배경이 되고 있다. 이 만화도 명백히 “백합의 패러디”이지만, 여기서는 비지니스 백합이라 불리는 상법이 패러디의 대상에 들어간 점이 신선하다. 또, 3권부터 중요한 카페 이벤트로, 가공의 학생대표 “블루메”를 선발하는 인기투표가 등장한다. 『독서클럽』의 「가라스마 베니코 연애사건」과 닮은 흐름이지만, 여기서는 “손님”과 “연기자” 모두가 이 인기투표는 컨셉 카페 내에서 이뤄지는 허구적인 일임을 인식하고 있는 게 포인트다. 이 이미지를 현재의 현실에 비유하자면, 여학교보다는 아이돌에 가까우며 지금도 변화하고 있는 백합의 지형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허나, 이 작품마저도 연기하는 것, 그러니까 후지모토 유카리가 전형적인 요소로 들었던 “연극”을 통해서 패러디를 행하고 있음을 생각해보면 더 대담한 결론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적어도 1970년대의 소녀만화 시절부터, 백합은 “연극”을 통해서 로맨스물을 패러디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로미오와 줄리엣」과 같은 내용을 일부러 여성들끼리 행하는 것으로, 연애를 사회적인 역할 수행(롤 플레잉)으로 상대화하여 사랑의 실상을 폭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직 착상과 가설에 지나지 않지만, 이 대담한 결론이 맞다면 패러디란 수법이 이미 백합 장르의 코어이며, 백합을 진화/변화시킨 동력원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글의 “두 작품은 엄밀하게는 백합이 아니다”는 전제부터 부정하고, 두 작품이야말로 백합의 정신을 이어받은 것으로 봐야할지도 모른다. 이 문제를 입증하고자 한다면, 연극을 이용한 작품군의 검토 뿐 아니라 에스 문화 — 타카라즈카 가극단 — 백합물과 같은 문화적 네트워크까지 다뤄야 하기에, 나중의 연구 테마로 남겨두겠다.
어느 쪽이든, 지금 백합은 그 세력을 확대하는 단계에 있으며 그 표현이 매너리즘에 빠졌다고는 할 수 없으리라. 백합의 역사는 길지만, 아직 그 가능성은 풍부한 장르이며, 계속해서 성장/변화해 갈 것이다. 그 안에서 이 글을 어떻게 위치지을지는 무척이나 애매하다. 독자에게 있어서는 이 글이 그 의의를 더는 갖지 못하는 흔적기관 같은 분류의 것일지도 모른다. 본론에서도 반성점은 여럿 있으나(예를 들어, 에스 문화와 백합의 관계와 그에 따른 작품 비평이 없던 점, 레퍼런스가 한정되어 있던 점 등), 나로서는 그 점이 가장 걱정된다.
하지만, 역사성을 강조한 이 글에 대해 생각해보면, 그 10년 전의 일을 기억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자료로 사용해도 좋으리라. 그렇게 함으로써 백합 매니아인 독자들이 더 백합을 즐길 수 있다면, 기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