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맨스.
지금 우리들에게 연애 감정이나 로맨스란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역접으로 시작한다. 주변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여러 조건들에도 불구하고, 설령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지라도… 등등. 그 접사는 너무나도 강력해서, 이야기의 우주에서는 로맨스가 다른 모든 요소들을 빨아들이는 블랙홀로 나타나곤 한다.
단, 이는 결혼이 가문간의 교환에 그쳤던 전근대에 대해, 인간을 자유롭고 독립된 개인으로 본 근대의 반발에서 비롯되었음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 모든 조건에도 불구하고 자유롭게 사랑하라, 근대는 그렇게 명령한 것이다. 물론, 남녀 둘이서 결혼해 4인가족이란 단위를 형성해서 지금의 시스템을 유지하라는 추가조건을 붙여서.
많은 ‘사랑’을 외친 운동들, 노래들, 이야기들은 실은 이 추가조건으로부터 해방을 목표로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된 개인들이’, ‘자유롭게’는 그대로 남겨졌다. 아니, 훨씬 더 강력해졌다. 그러나, 그 ‘독립된 개인들’이 ‘외적인 조건’과는 다른 ‘내면’을 지닌 존재임을 강조할 수록 — ‘자유롭게’라는 부사와는 달리 — 어떤 권력의 냄새가 나게 되었다.
이를 테면,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아서, 누군가의 그 상냥함 때문에’ 이끌리기 시작하는 전개는 로맨스물의 왕도이리라. 이는 로맨스가 갖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사상을 극한까지 밀어붙인 형태이다. 자신이 이 세계에 있을 수 있는 준거로서 ‘외적인 조건’이 아닌 상대의 ‘내면’에서 찾아낸 것으로, 바꿔말하면 순애 그 자체이다. 그러나 그 순애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가 보기에, 이는 자발적인 구속이다. 구세주에 대한 죄인의 끝없는 속죄이며, 소유하는 왕에 대한 소유당하는 노예의 충성심이고, 결국엔 갚을 수 없는 빚으로부터 생겨난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다.
우리들도 이에 무자각적이지는 않기에, 이야기 속에서는 여러 방어 메커니즘이 등장한다. 때로는 그게 상호비대칭적인 구원이기도 하고(서로 상대방에게 도움받았다고 생각하거나), 관계의 역전을 통한 권력의 해체이기도 하다(피구원자가 클라이막스에서 구원자를 구해낸다거나). 하지만 나는 이게 근본적인 해결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건 여전히 사랑을 ‘빚’이라는 경제적이고 권력적인 용어로 대체한 위에, 다시 한 번 평등한 관계를 만들어내려는 임시변통에 불과하다. 이중의 왜곡이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나에게도 분명한 답은 없다. 다만, “빚은 약속의 타락한 모습”이라는 어느 아나키스트의 말을 힌트로 삼아서 이 권력관계로부터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그럼으로써 지금의 ‘연애감정’으로부터 ‘사랑’을 탈환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예감만이 내 곁을 맴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