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된 민족과 대한민국에 대하여
동아시아에서 민족이란 단어는 매우 까다로운 용어이다. 1차 사료부터 현재 분석까지 여러 개념이 섞인데다가 그걸 잘 나누려고 하면 오히려 오독에 이르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Self-determination이 민족자결주의로 번역된 걸 봐도 알 수 있듯이 주로 국민Nation이긴 하지만, 인민People과 혈통과 관련된 Tribe, Ethnic group 심지어는 Race으로서의 의미도 갖고 있고, 이 단어를 쓰는 사람이 각 의미들을 어떤 배합과 비율로 섞어 쓰는지 주의 깊게읽어야 단어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국민과 민족이 일치하는 유럽과 달리, 약 15세기부터 중국(한족)-조선-일본은 비교적 일정한 영토 — 일정한 정치공동체 — 일정한 언어를 공유하여 이후 국민국가 형성이 비교적 스무스하게 일어났다. 이는 알자스-로렌 지방 문제로 프로이센이나 프랑스가 문제를 겪었던 것과는 차이가 많이 크다. 즉, Ethnic group으로서 인식이 어느 정도 바탕에 깔려있다는 것.
한편 국민(Nation)으로서의 정체성은 굉장히 애매한데, 근대화를 준비했던 대한제국은 15년도 버티지 못했으며, 오히려 40년동안의 제국일본의 지배 아래에서 근대화 과정을 거쳤다. 1920년의 동일화 정책 시행 이후에 이들은 자신을 말하자면 조선계 일본국민과 같이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해방 후에는 이들도 “눈을 뜨”긴 했지만). 그들에게 일본 본토에 사는 사람들은 어디까지나 “내지인”이었던 것이지 “일본인”이 아니었던 셈이다.
즉, 조선반도에 근대적 의미의 “국민”을 각인한 건 제국일본이었다. 물론 “이등시민”이었지만 말이다. 한-중-일과 달리, 아예 그러한 Ethnic group으로서 정체성을 지니지 못했던 대만의 경우에는 제국일본의 “국민” 각인이 더 확연해진다. “대만어” 자체는 사실 존재하지 않으며, (물론 그 전에 네덜란드 점령이 있긴 했으나…) 제국 일본의 지배로 “일본어”가 표준어이자 공용어가 되었고 그들에게 하나의 “국민”이라는 개념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대만은 이후에도 국민당과의 문제 등을 겪으면서 “대만 국민”이란 개념이 성립하지만 이는 일단 논의에서 차치해두자.
나는 위의 인식에서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주장한다. 일본인들이 스스로 “이렇게 일본이 전쟁에서 질 줄은 몰랐다”고 했던 것처럼, 조선 반도 안의 많은 조선인들도 전쟁에서 질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듯하다. 결과론적으로 보면 “말도 안되는 소리”이지만, 오히려 “조선인의 독립” 쪽이 당시 조선 내부의 조선인들 사이에선 비현실적인 것이었다. 현실적으론 신사가 세워지고 일본어를 필수로 공부하며 징병과 시민권, 투표권이 가까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압도적 현실”을 거부한 것이 상상의 정부, “대한민국 임시정부”였다. 그것이 허구에 불과하더라도, 프랑스가 “자유 박애 평등”을 모토로 한 프랑스 혁명에 기반하고 미국이 “대표없는 곳에 세금없다”는 독립전쟁에 기반한다면, 대한민국 역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그 기반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다. “압도적인 현실”을 부인하고 “상상된 공동체” 혹은 “잠재적 공동체”에 대한 믿음과 실천이야말로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모토가 대한민국의 정통성이라고 … 믿고싶다.
믿고 싶다고 한 이유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 정통성 역시 허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공화정이 피에르의 공포정치와 나폴레옹 3세의 귀환, 미국의 흑인 노예제도와 레드 컴플렉스에서 알 수 있듯이 “실제로” 대한민국 건국에서 일어난 일은 위와 같은 가치 추구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다.
해방직후에 백색테러가 횡행했으며, 옛 집의 배전시스템을 그래도 둔 채 새로운 전류를 흘릴 뿐이라는 베네딕트 앤더슨의 비유와 같이, 조선총독부 아래 일했던 많은 관료들이 그대로 자리를 유지했으며 박정희는 만주의 국가주도적 근대화 계획을 많이 참고했다. “대한민국 국민”은 그렇게 탄생했다. 따라서 역사적 분석을 위해서는 “대한민국”을 2차세계대전에 의해 탄생하고 냉전에 의해 형성된 나라라고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나는 3.1운동을 3.1혁명으로 부르자는 주장에는 반대하는 편인데, 3.1운동이 조선독립을 향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반이 되었다고 해도 3.1운동이 하나의 방향으로만 움직였던 것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민족주의에 기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존중하는만큼, 대일본제국에 대한 다양한 형태의 저항들(공산주의, 아나키즘, 심지어는 자치론까지 포함하여)을 배제하는 것은 신화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뭐, 그러니까 내가 위의 위에서 말한 “압도적 현실”에 대한 부정 운운은 의도적인 오독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성립 축하문에서 “我國民은 다시 異民族의 奴隸가 아니오”를 거부하고, “二千萬 自由民아 起하야 自由의 戰을 戰할지어다”를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모토라고 말하는 셈. “국민”이 아니라 “자유민”을 추구하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