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성의 마녀, 우테나, 펭귄드럼
빚과 구원과 사랑에 대하여.
내가 보기에, 수성의 마녀의 테마는 “계승” 혹은 “상속”이다.
구엘의 경우에 “상속”은 했으나 정당성을 지니지 못했기에 “계승”을 하지는 못했다. 그의 ‘부친살해’ 역시 실패했다. 이 사실이 밝혀지면 그의 상속권은 박탈당할 것이며, 특히나 현재(17화) 베네리트 그룹 내에서 델링 총재의 지위에 대한 상속권을 놓고 다투는 중에 이 사실은 결정적인 아킬레스 건이 될 것이다.
구엘이 ‘부친살해’에 실패했다니, 아버지를 죽였는데 왜 ‘부친살해’에 실패했단 말인가, 그렇게 물어볼 수도 있다. 그러나 부계사회의 “계승”이란 관점에서 보면 구엘은 ‘부친살해’에 실패했고, 오히려 샤디크가 ‘부친살해’에 성공했다.
샤디크 제네리는 일부러 책상 위에 올라서 휠체어에 앉아 일어날 수 없는 새리우스 제네리를 내려다보면서, 자신의 사상에 대해 그에게 연설을 늘어놓았다. 이는 명백한 마운팅이며, 상징적인 ‘부친살해’다. 제우스가 크로노스를 죽이고 새로운 ‘아버지가’ 되었듯이, 구질서를 파괴하고 신질서를 세우지만 그 역시 전형적인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부계사회의 계승 과정. 샤디크는 이미 ‘제네리’ 가문의 부계사회 “계승”을 이루었다. 반면 구엘은 자신이 의도해서 아버지를 죽인 것도 아니고, 새로운 질서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계승”의 정당성을 지닌 것도 아니다. 구엘은 ‘아버지’가 될 수 없는 존재로 변했고, ‘제타크’의 부계사회는 조금씩 붕괴중이다.
그렇다면 <수성의 마녀>의 테마는 ‘과거와의 단절’이 될 것인가? 그러기엔 주식회사 건담을 세운 시점에서 주인공 둘은 ‘유산’(아시다시피 빚도 유산에 포함된다) 을 일부 상속받았다. <수성의 마녀>가 만약 단순히 도피나 단절이 아닌, 계승하지 않으면서도 책임을 지는 방식을 보여준다면 나는 이 작품을 <소녀혁명 우테나>와 견줄 수 있다고 본다.
<소녀혁명 우테나>는 ‘혁명’을 일으키려 했고 그래서 두 명의 여성이 학원의 질서를 뚫고 황무지(Abandoned ground, 버려진 땅)로 나아갔다. 즉 질서가 닿지 않는 바깥 영역으로 나아가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고자 했다. 수성의 마녀는 두 주인공이 여전히 베네리트 그룹이나 건담이란 기술을 ‘상속’하면서도, 그 선대가 지닌 빚에 대해서 나름대로 대답하고 책임지고자(Respons-ibility, 응답가능성) 한다.
빚을 현금화하는 일인 ‘상환’과 절망적인 상황이 기적적으로 타파되는 ‘구원’은 영어로 모두 같이 Redemption이다.
단, 여기서 ‘구원’은 트위터(=한국어권 오타쿠들 사이)에서 쓰는 ‘구원서사’의 파기를 의미한다. 트위터에서 주로 언급되는 ‘구원서사’는 A가 B에게 ‘어떻게 해도 갚을 수 없는 빚을 주는 일’이 일어났음을 의미한다. 물론 쌍방의 대칭적 구원(서로 구원당했다고 생각함) 혹은 그 빚에 대해 ‘질적으로 전혀 다른 것을 증여함(≠등가교환. 등가교환은 애초에 ‘관계’를 맺지 않는다)’으로써 관계를 지속한다.
<돌고도는 펭귄드럼> 20화의 이 장면은 그런 부분에 대한 매우 그럴싸한 요약이다.
‘혹시 상대가 도망칠 때 내가 좇으면 사랑이 맺어져?’
‘맺어질 수도 있지’
‘글쎄. 그런 상대는 도망만 가고 맺혀질 과실은 넘겨주지 않을 거야’
‘날카롭네. 맞아, 도망치는 상대는 과실을 넘겨주지 않아. 그럼 쉽게 게임이 끝나니까.’
사네토시는 ‘도망치는 상대는 과실을 넘겨주지 않아. 그럼 쉽게 게임이 끝나니까.’ 라고 했다. 그의 말을 조금만 수정하면 구원서사의 관계를 묘사할 수 있다. “구원서사의 주인공은 결코 빚을 지불할 수 없다. 그러면 쉽게 그 채무관계가 끝나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돌고도는 펭귄드럼>의 키워드인 “환승”은 아래와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는 쇼마와 칸바가 스스로의 목숨을 지불하는 것으로 죄의 모든 순환이 닫혔고(선대의 빚이 지불되어 관계가 청산되었고), 히마리와 링고, 마사코는 구원되었다. 하지만 둘의 희생은 관계의 끝이 아니라 오히려 시작이었다. 그것은 또 다른 연쇄, 열매를 나눌 수 있는 사랑의 연쇄(돌고 도는 펭귄드럼)를 활성화시키는 일이었다. 즉, 등장인물들은 하나의 연쇄에서 또다른 연쇄로 이동했다. 그들은 여전히 운명이란 열차 위에 놓인 상태지만 하나의 순환선에서 다른 순환선으로 “환승”할 수 있었다.
그렇다, 마지막 화에서 사네토시가 암시했듯 열차는 다시 올 것이다. 위기의 순간은 다시 올 것이다. 죄와 벌의 순환선, 그리고 사랑과 나눔의 순환선, 두 순환선은 어디선가 서로 교차한다. 하지만 모모카가 말했듯이, 펭귄드럼의 끝에서 환승법을 알게 된 등장인물들에게 이제 그런 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그럼 다시 <수성의 마녀>로 돌아가보자. 과연 미오리네와 슬레타는 이 복수의 순환을 청산=Redemption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 복수를 청산한 뒤의 ‘타인’이 될 두 사람은 — 혹은 더 나아가 스페시언과 어시언들은 — 어떻게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을까? 햄릿을 말을 빌리면, “그것이 문제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