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서 『이윽고 네가 된다』는 「좋아해, 이외의 말로」 이야기할 필요가 있었을까
「코이토 유우는 무성애자인가 아닌가」 논쟁에 부쳐
이 글은 2019년 경 한국의 대중문학 비평 사이트인 텍스트릿Textreet 에서
'코이토 유우가 무성애자가 아니냐'는 논란이 일어났을 때, 필자가 코이토 유우가
무성애자라는 주장에 반박하기 위해 쓴 글을 다시 정리한 포스팅이다.
어째서 ‘좋아해, 이외의 말로’ 이야기해야만 했나
『이윽고 네가 된다』 TVa 13화에 삽입된 곡, “좋아해, 이외의 말로”의 가사는 다음과 같이 끝난다.
너에게 하고 싶은 말 / 언제나 마음 속에 메모해두지만/
목소리를 듣게 되면 / 전부 잊어버려서/
비밀 이야기조차 / 흔하디 흔한 말로 채워져버려서/
어쩌면 좋지/ 무슨 말을 하지 /
좋아해, 이외의 말로.
이 가사를 표면적으로 독해하자면, 이른바 ‘친구이상 연인미만’의 두 사람이 서로에게 고백하지 못한채 스쳐지나가는 상황을 표현한 것으로 읽어낼 수 있다. 『이윽고 네가 된다』 의 내용을 숙지한 독자라면, “상대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면, 그런 상대를 나는 좋아해 줄 수 없다”는 ‘나나미 토우코’에 대하여, 바로 그 조건을 이해하기에 주인공 ‘코이토 유우’가 그녀에게 고백하지 못하는 상황, 딜레마, 그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글에서 그녀들에게는 문자 그대로 ‘좋아해, 이외의 말’이 필요했다는 것, 또한 그 가사가 그대로 『이윽고 네가 된다』 라는 작품을 읽기 위한 열쇠가 된다고 주장하고 싶다.
그렇다면, ‘좋아해’라는 말의 어디가 문제인가. 그것은 『이윽고 네가 된다』 가 “로맨틱 러브 이데올로기” 그 자체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윽고 네가 된다』의 제 1화 첫 부분은, 아래와 같은 독백과 함께 시작된다.
순정만화나 / 러브송의 / 말은 반짝거려서 / 눈부셔서/
의미라면/사전을 펼치지 않더라도/알 수 있지만
내 것이/되어주지는/ 않는다
(원문: 少女漫画や/ラブソングの/ことばはキラキラしてて/眩しくて
意味なら/辞書を引かなくても/分かるけど
わたしのものに/なっては/くれない)仲谷鳰『やがて君になる (1) 』、KADOKAWA、2015年、3頁。
주인공 ‘코이토 유우’는, 누군가에게 ‘좋아해’라는 감정을 품은 적이 없다. 즉, ‘연애 감정(로맨틱 러브)’를 느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반한 적도 없고, 고백을 받아도 두근거리지 않는다. 그렇기에, ‘상대가 자기(따위)를 좋아해주면, 나는 그 상대를 좋아해줄 수 없다’는 ‘나나미 토우코’의 기묘한 조건을 이해하고, 그녀와 ‘관계’를 맺게 된다. 적어도 이야기 초반에서 ‘코이토 유우’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자, 위의 단락에서 나는 ‘좋아해’ 라는 말을 어느샌가 ‘연애 감정(로맨틱 러브)’으로 바꿔치기 했다. 하지만, 이것은 독자들을 기만하기 위한 궤변이 아니다. 오히려 이 ‘바꿔치기’야말로, 지금 우리들에게 발생하고 있는 일이다. ‘코이토 유우’의 독백 중에서 ‘순정만화나 러브송의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가 생각해보자. ‘좋아해(好き)’나 ‘정말 정말 좋아해(大好き)’라는 말. 그것들은 ‘연애 감정(로맨틱 러브)’의 말로 표현된다. 이 말들은 ‘코이토 유우’에게, 자신이 경험해본 적 없는 영역에 속하는 말들이었다.
이러한 감각은, 『이윽고 네가 된다』만의 특별한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이쿠하라 쿠니히코 감독은 TVa『유리쿠마 아라시』를 제작할 때, 다음과 같은 인터뷰를 한 적 있다.
이쿠하라 : 예를 들면, ‘사랑’에 대해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합시다. 지금, 남녀 캐릭터끼리의 연애를 그리기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이라는 것 자체가, 남녀의 관계로 그리려고 하는 순간, 이미 ‘클리셰(ネタ)’가 되버리지 않습니까 (중략) 하지만 백합이라는 장르에 뛰어들어, 메타포로써 여러가지 것을 표현하면 사랑은 아주 쉽게 그릴 수 있습니다. 현대에 사랑을 기리기 위해서는 백합이란 장르는 정말 좋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https://www.excite.co.jp/news/article/E1421113187884/?p=2(재인용)
이쿠하라 감독의 발언을 이 포스팅 용어로 해석하자면, ‘좋아해’란 말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할 때, 그것은 ‘클리셰’적인 ‘로맨틱 러브’로 회수되어버리고만다, 표현하려는 것과 괴리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쿠하라 감독은 ‘남녀캐릭터끼리의 연애’를 하면 그렇게 되고, ‘백합이란 장르’라면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바꿔말하면, ‘좋아해’라는 말이 속하는 영역은 ‘로맨틱 러브’에 의해서 이미 점령당했다.’좋아해’ 라고 말하는 순간 ‘비밀 이야기’는 ‘흔하디 흔한 말로 채워져’ 버린다. ‘남녀 캐릭터끼리의 연애’를 그릴 때처럼 ‘클리셰’로 회수당한다. 그렇기에, ‘코이토 유우’는 지금까지 ‘로맨틱 러브’에 해당하는 감정을 갖지 않았으며, ‘코이토 유우’와 ‘나나미 토우코’의 관계는 ‘좋아해, 이외의 말로’ 이야기 될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면, 이 기사의 목표는 두 가지다. 첫째, ‘연애 감정’ 혹은 ‘로맨틱 러브’라 불리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탐색하는 일. 둘째, 『이윽고 네가 된다』 란 작품 속에서, ‘좋아해, 이외의 말’이 어떻게 구체화되었는지 논하는 일.
먼저 ‘연애 감정’이나 ‘로맨틱 러브’라 불리는 이데올로기에 대해 알아보자.
「연애」라는 규범
우리들이 ‘연애’라고 부르는 것은, 그렇게 긴 역사를 갖고 있지 않다. 물론 남녀가 사랑을 나누거나,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는 일 자체는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그러나, 흔히 말하는 ‘자유연애’가 시작된 것은 ‘근대’란 시대부터이다. 그 이전의 시대에는, 결혼이란 것이 가문끼리의 결합에 가까웠으며, 반드시 로맨틱한 경험을 동반해야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이뤄지는 선 보기나, 혹은 정략 결혼 따위를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들은 ‘연애’라는 것을 너무나 뻔한 ‘클리셰’로 이해하기 되버린 걸까.
우에노 치즈코의 저서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는, 이 질문에 대해 유용한 설명을 제시한다. 『여성 혐오를~ 』는 본디 잡지에 연재했던 칼럼을 모았기에 여러가지 주제들을 다루지만,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성애의 탈자연화’에 관한 논의이다. 우에노는 미셸 푸코의 논의를 따르며, ‘성애’와 ‘가부장제’가 결합된 것은 19세기 부르주아 계급이 등장한 것과 깊은 관계를 지니고 있다고 설명한다. 다소 거친 요약이지만 최대한 알기 쉽게 우에노의 논의를 정리해보겠다. 또한, 여기서 ‘성애’나 ‘에로스’라는 우에노의 표현을, 우리들이 쓰고 있는 ‘연애 감정’이나 ‘로맨틱 러브’라 부르는 것과 교환 가능한 것으로 상정한다.
『여성 혐오를~』에 따르면, ‘성은 본디 공격적인 것이다’라던가 ‘성은 친밀함의 표현이(어야 한)다’는 언설은, 시대라는 제약을 받아 만들어진 규범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즉, 애초에 ‘성’이라는 것은 어떤 성질도 지니지 않으며, 시대에 따라서 ‘성은 이러해야 한다’고 생각될 뿐이다. 우리들의 사고가, ‘남녀 캐릭터끼리의 연애’를 상상할 때 ‘클리셰’로 포착해버리는 이유는, ‘이성애로 묶여진 커플이 부부가 되고, 섹스를 해서 애를 갖는다’는 부르주아 계급적인 생활이 ‘정당성을 지닌’ 것으로 취급받는 ‘규범’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우리는 그 ‘규범’을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일까. 우에노는 이렇게 설명한다. 중세에 존재했던 종교(신)이란 거대한 규범이 상실되고, 자연의 법칙을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과학’이 그 자리를 대체했던 것이 19세기란 시대이다. 과학에 의해 대표되는 근대적 사고는 성애에도 적용되어, 규범에 불과한 부르주아적 생활이 그대로 자연의 법칙으로 취부되었다.현재의 과학적 관점에서야 동성애는 인간이란 종에서만 발견되는 것도 아니고, 병리적인 것도 아니지만, 당시엔 ‘성애’ 그 자체가 ‘과학’의 규범으로 분석되어 어떤 정당성을 부여받았단 것이다.
게다가, 부르주아 계급의 핵가족이란 형태가 정당성을 지님으로써, ‘성애’는 사회적인 영역에서 분리되어 가정 안으로 내몰리게 된다. 이 ‘사적화(Privatization)’에 의해 성애는 특권화 되어 ‘어떤 성행위를 하는가’가 그 사람의 인격을 나타내는 지표가 된다.
『이윽고 네가 된다』의 등장인물인 ‘사에키 사야카’의 에피소드를 예로 들어 이 사적화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설명해보자.
‘사에키 사야카’라는 캐릭터는 주인공들 중 가장 먼저 레즈비언이라는 정체성을 자각한 인물이다. 그녀는 ‘나나미 토우코’와 동급생으로 호감을 가지고 있지만, ‘나나미 토우코’가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과 거리를 두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녀는 중학교 때 여자 선배와 사귀었던 경험이 있는데, 그 선배는 ‘사에키 사야카’와의 관계에서 ‘졸업’한 상태였다. 재회했을 때 그녀는 과거의 관계를 ‘한때의 방황’이라고 표현하며, 만약 여자아이를 좋아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자신의 잘못’이며 ‘평범한 아이’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사에키 사야카’에게 말한다.
재회 장면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는 ‘연애 감정’이라는 규범이 얼마나 강한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인간을 규정하는지를 보여준다. 선배라는 인물의 담론에서 여자가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은, 여자가 여자와 성행위를 한다는 것은 ‘사에키 사야카’를 ‘평범한 아이’에서 탈락시킬 만큼의 사건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설령 선배라는 캐릭터에게는 ‘연애 감정’을 흉내 낸 것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그녀 자신이 ‘사에키 사야카’와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그녀는 자신이 ‘평범’이라는 것, 규범의 안쪽 존재라는 것을 강하게 의식하고 ‘사에키 사야카’와의 경험을 일시적인 것으로 안전지대로 몰아넣으려 한다. 하지만 바로 거기에 균열이 있다.
그녀의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그녀 스스로도 ‘한때’가 정상적이지 않았음을 인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자신뿐만 아니라 ‘사에키 사야카’도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그녀는 말한다. 그녀의 논리에 따르면 사람은 ‘정상’과 ‘비정상’ 사이를 오갈 수 있다. 이는 동성애를 ‘모방’하고 ‘학습’하는 것과 같은 과정으로 이성애를 ‘습득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논법은 성적 지향에 대한 지금까지의 과학적 설명에 반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자연스러운 것’으로서의 이성애의 특권적 지위를 뒤흔든다.
이 균열을 메우는 보이지 않는 전제는 무엇일까. 그것은 성애가 가정=사적인 관계 안에만 갇혀야 할 것이지, 공적으로 논의되어서는 안 된다는 성애의 사적화 논리이다. ‘사에키 사야카’라는 인격이 ‘정상’인지 아닌지는 ‘어떤 성행위를 하는가’라는 기준으로 판단된다. 이는 성애라는 것이 전적으로 개인의 영역에 속하고, 개인을 대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배가 ‘사에키 사야카’의 성적 지향을 ‘자기 탓’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것도 그 ‘사적인 관계’만이 성적 지향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윽고 네가 된다』의 흥미로운 점은 ‘연애 감정’이나 ‘로맨틱 러브 이데올로기’의 메커니즘을 고발할 뿐만 아니라, ‘연애 감정’에 의해 독점된 ‘좋아해’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관계를 탐구하고 그것을 제시하려 했다는 점에 있다. 다음 절에서는 이러한 ‘좋아해, 이외의 말’이 어떻게 구체화되는지 논하고자 한다.
순환에 의해 ‘로맨틱 러브’로부터 해방되기
‘나나미 토우코’를 중심으로 한다면, 이야기의 축을 이루는 것은 ‘코이토 유우’와 ‘사에키 사야카’라는 두 인물이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을 논하기 전에 또 한 명의 캐릭터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 바로 ‘마키 세이지’라는 인물이다.
‘마키 세이지’는 ‘코이토 유우’와 마찬가지로 학생회 소속의 남자 신입생으로, ‘코이토 유우’와 ‘나나미 토우코’의 관계를 목격하면서 이야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는 인물이다. 우리는 여전히 ‘연애 감정’이라는 규범이 강하게 작용하는 현실세계에서는, 그 규범에서부터 벗어난 사람에게 (부당한 처사일지라도) 가혹한 처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이윽고 네가 된다』 를 읽지 않은 사람이라면 ‘마키 세이지’가 그녀들을 협박하는 듯한 전개를 상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윽고 네가 된다』 는 그런 전개를 선택하지 않았다.
‘마키 세이지’와 ‘코이토 유우’는 ‘연애 감정’이라는 감정을 가져본 적이 없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는 캐릭터다. 예를 들어 ‘마키 세이지’는 ‘코이토 유우’와 마찬가지로 이성의 고백을 거부한다. 하지만 그 자신은 ‘연애 감정’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연애 감정’을 경험하고 싶은 ‘코이토 유우’와는 달리 ‘마키 세이지’는 철저하게 ‘연애’의 관객이 되려고 한다.
이 대비를 구체적으로 다룬 연구가 있다. 마쓰우라 유우의 「에이섹슈얼/에이로맨틱의 다중적 지향성=다중적 지향 — 나카타니 료의 『이윽고 네가 된다』의 ‘하는 것’과 ‘보는 것’의 틈새에서」이다. 이 논문에서 마쓰우라의 목적은 ‘무성애’를 ‘섹슈얼리티’ = ‘성애 규범’의 반대편에 놓아버리면 잃을 수 있는, 다양한 성적 지향과 관계의 존재방식에 주목하는 것이다. 동시에 마쓰우라는 그것들이 다양한 ‘비-섹슈얼한 것’으로서 스펙트럼 상에서 표현될 수 있는 가능성을 『이윽고 네가 된다』 라는 작품에서 찾아내고자 한다.
마쓰우라의 논의를 간단히 요약하면, 『이윽고 네가 된다』 라는 작품은 주인공들의 성장을 통해 이성애 규범, 즉 이 글에서 말하는 ‘연애 감정’의 규범에 대한 거부를 그리는 동시에, ‘마키 세이지’라는 캐릭터를 등장시킴으로써 성적 규범 그 자체를 상대화시키는데 성공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마키 세이지’를 ‘관객’으로 위치시킴으로써 이 작품은 ‘연애를 하고 싶은 욕망’=’하는 것’에서 분리된 ‘연애 감정에 대한 욕망’=’보는 것’을 표현하며, 관객과 무대 위 배우 사이의 역동성을 그려내는 것도 실현하고 있다.
‘마키 세이지’라는 인물은『이윽고 네가 된다』 라는 이야기에서 배제된 것도 아니고, 그녀들과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안전한 곳에서 관찰하는 캐릭터로 그려지는 것도 아니다. 그 자신도 이성애자로부터 동질성을 요구받기도 하고, ‘연애하고 싶은 욕망’을 품은 ‘코이토 유우’로부터 동질성을 요구받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관객으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이해하고 ‘배우’의 그런 요구를 거부한다.
이 글의 표현으로 바꿔쓰자면, 마쓰우라의 논의는 ‘연애 감정’의 규범을 상대화함으로써 ‘좋아해, 이외의 말로’ 성애의 존재방식을 그린 작품으로 『이윽고 네가 된다』 를 평가하고 있다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관객인 ‘마키 세이지’가 그렇게 행동함으로써 배우인 ‘코이토 유우’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태이다. 배우들의 요구를 거절함으로써 ‘마키 세이지’는 ‘코이토 유우’와의 관계를 명확히 할 뿐만 아니라 ‘코이토 유우’와 ‘나나미 토우코’의 관계를 진전시키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여기서 한 가지 더 『이윽고 네가 된다』을 연구한 논문을 참고하고 싶다. 가와사키 미즈호의 「백합과 수국 — 애니메이션 「이윽고 네가 된다」 8화의 사례 분석」이다. 가와사키의 논문은 구조주의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 목적은 수국의 의미(=시니피에)를 해명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교환’되고 있는지를 밝히는 데 있다. 가와사키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어떤 색의 수국을 좋아하는가’라는 작품 속 대사인데, 요컨대 이 논문은 수국의 꽃말이나 주인공들이 좋아하는 색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누가 누구에게 그 질문을 했는지, 어떤 상황에서 질문했는지, 어떻게, 무엇과 무엇을 주고받았는지를 분석한다.
이 질문은 먼저 ‘나나미 토우코’가 ‘사에키 사야카’에게, 그리고 ‘사에키 사야카’가 ‘코이토 유우’에게 던진다. 마지막으로 ‘코이토 유우’는 ‘사에키 사야카’에게 그 질문을 던지지만, ‘나나미 토우코’는 그 질문을 듣기도 전에 잠이 들어버린다.
가와사키는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를 인용하면서 이를 ‘파롤의 교환’으로 보고, 그 교환의 유형에 대해서는 ‘집단 A→집단 B, 집단 B→집단 C, 집단 C→집단 A’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일반 교환’으로 보고 있다(참고로 집단 A와 B 사이에서만 이루어지는 경우는 ‘제한적 교환’으로 보고 있다). 또한 가와사키는 교환이라는 행위에는 보답이 수반된다고 주장한다. 가와사키에 따르면, 먼저 ‘나나미 토우코’는 ‘사에키 사야카’가 그녀의 팔에 매달려서 보여준 ‘호의’에 대해 이 질문을 던진다. 다음으로 ‘사에키 사야카’는 ‘코이토 유우’가 식사 중에 건네준 감자튀김에 대한 보답으로, 혹은 운동회에서 건네준 배턴에 대한 보답으로 이 질문을 던진다. 마지막으로 ‘코이토 유우’는 ‘나나미 토우코’의 호의에 대한 보답으로 이 질문을 한다.
‘사에키 사야카’와 ‘코이토 유우’는 연애 관계에 있어서는 서로에겐 적대적이라 볼 수 있지만, 동시에 같은 학생회라는 공동체에 소속된 멤버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 공동체를 유지해야 하는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이 교류에 참여했다고 가와사키는 분석한다. 하지만 공동체에 참여한다는 것은 공동체의 질서를 따르는 것이며, 공동체 안에 있는 권력관계에 편입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나나미 토우코’에게 ‘타인이 나를 좋아한다’는 것은 ‘타인으로부터 무언가를 요구받는다’는 것과 같다. ‘좋아함’을 주고받는 ‘선물의 권력’을 거부하기 때문에 그녀는 ‘어떤 색의 수국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들을 능력이 없다(혹은 들으려 하지 않는다).
가와사키의 논문에서는 직접적으로 논하지 않았지만, 이 해석에 따르면 같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같은 질서에 놓이는 것을 거부하는 ‘나나미 토우코’에 대해 ‘코이토 유우’가 그 공동체가 유지하려고 행동하는 것에 『이윽고 네가 된다』의 주제가 있다고 짐작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여기서 가와사키가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와사키는 ‘코이토 유우’가 사람을 좋아한다는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무언가를 주려고 하는 입장에 있다는 점에 주목하며 다음과 같이 논한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로서 ‘좋아함’의 일반적 교환이 ‘해결’이 되고 있는 것은 설명이 필요하다. ‘좋아함’은 개인들 사이에서 ‘제한적으로 교환되는 것’으로 여겨지기 쉽기 때문이다. 라캉은 ‘사랑’을 ‘사랑하는 자 amant / 사랑받는 자 aimè’의 결합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사랑은 가지지 않은 것을 주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테제를 내놓고 있는데, 지젝은 여기에 ‘그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라고 덧붙인다. 이것이 바로 ‘언젠가 너에게 닿기를’(특히 8화)의 메시지이며(중략) 이로써 삼자의 ‘일반적 교환’은 견고하게 이루어진다.
가와사키 미즈호, 「백합과 수국 — 애니메이션 「이윽고 네가 된다 」 8화의 사례 분석」, 『비교문화연구』145, 일본비교문화학회, 2021, 47쪽.
‘연애 감정’의 규범이 ‘사적화’였음을 상기해보자. ‘사에키 사야카’의 선배가 상정한 ‘좋아함’은 바로 그런 ‘제한적 교환’에 머무는 것이었다. 이 분석에 따르면 『이윽고 네가 된다』는 이러한 ‘좋아함’의 전제를 무너뜨리는 형태로 ‘사랑’을 그렸다고 할 수 있다.
‘코이토 유우’에게 응답하는 마지막 권에서 ‘나나미 토우코’는 ‘사에키 사야카’에게 고백을 받았을 때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여기서 ‘사에키 사야카’에서 ‘나나미 토우코’를 거쳐 ‘코이토 유우’로의 교환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 논의는 더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마키 세이지’가 ‘코이토 유우’에게 그랬던 것처럼, ‘사에키 사야카’가 ‘나나미 토우코’에게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어른들의 조언 덕택이다. 『이윽고 네가 된다』에서 그려지는 ‘사랑’은 둘만의 사적인 것을 넘어 공적인 영역으로 연결된다.
‘좋아해, 이외의 말로’ 말하기 위해서는 둘만의 대화로는 부족하다. 가장 사적인 대화인 ‘비밀 이야기’라 할지라도 그것은 곧 ‘연애 감정’이라는 규범에 갇혀 ‘흔하디 흔한 말’로 변질되어 버린다. ‘연애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둘만의 폐쇄적인 공간이 아닌 더 큰 순환이 필요하다.
그러나 ‘연애 감정’의 규범 역시 공동체의 산물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공동체’ 안에 살기 위해 ‘사에키 사야카’의 선배는 그녀와의 관계를 ‘일시적 방황’으로 치부하려 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공동체를 유지하려고 하는 것,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과도 순환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다. 아이 한 명을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그것은 ‘사랑’에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좋아해, 이외의 말’로 이야기되는 ‘사랑’임을 『이윽고 네가 된다』는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참고문헌
―― 우에노 치즈코, 『여성혐오를 혐오한다』, 나일동 訳, 은행나무,2017
――川崎瑞穂、「百合と紫陽花 — アニメ『やがて君になる』第8話の範例分析 — 」、『比較文化研究』145、日本比較文化学会、2021
――松浦優、「アセクシュアル/アロマンティックの多重見当識=複数的指向:仲谷鳰『やがて君になる』における「する」と「見る」の破れ目から」、『現代思想』49、青土社、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