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트레이버 2 더 무비 재감상
도쿄에 눈도 왔겠다, 오랜만에 패트레이버 2 더 무비를 재감상했다.
오시이 마모루 영화의 황금기는 딱 패트레이버~공각기동대까지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이때 영화들이 세 줄기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첫째로 테크놀러지의 재현, 다음으로 현실 정치적인 접근, 마지막으로 신화/종교적인 이미지. 사실 무엇이 먼저냐, 혹은 무엇이 더 중요하냐는 순서는 아니다. 오히려 이 셋이 대화하는 방식으로 영화가 이뤄졌다는 점이 중요하다.
단적으로 말해, 패트레이버 2 더 무비는 테크놀러지 재현에서도 다른 애니메를 능가한다. 이 영화는 단지 밀리터리 오타쿠의 쿠데타 시뮬레이션에 머물 수도 있었다. 안노 히데아키의 오네미아스의 날개라던가, 오토모 가쓰히로의 스팀 보이라던가, 그런 ‘시뮬레이션’에 집착한 나머지 다른 것에는 신경도 못 쓴 애니메이션 작품들은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자연법칙이나 교전규범이 얼마나 고증이 잘 되었는지가 아니라, 그를 통해 어떻게 관객의 인식에 관여할 것이냐다. 패트레이버 2 더 무비는 정보 테크놀러지의 발전을 통해서 대중들이 접하게 되는 2차 영상들을 반복적으로 영사한다. 저 유명한 환상의 폭격은 물론이며, 특정 프레임 안에서만 군인들이 존재하는 계엄령 씬도 마찬가지다. 오로지 2차적으로 전달된 영상 속에서 그것들은 존재하며, 환상처럼 리얼리티는 결여되어있지만 여전히 우리 현대인들과 공존하고 있다.
또, 80년대~90년대 사이에 중공업적인 기계에 대한 페티시적인 이미지는 일본 애니메에서 반복적으로 발견되며, 그것은 위에서 말한 감독들이나 거대 로봇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최근에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 등에게도 이어진 전통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 현실 정치적인 의미를 생성하려고 드는 경우는 드물었다. 오시이 마모루는 도쿄의 마천루와 폐공장을 한 화면에 집어넣는다던가, 경찰로봇인 패트레이버가 자위대 기지 앞에 서게 함으로써, 그것을 성공시킨다.
그리고 이것을 감싸는 것이 신화적이고 종교적인 이미지들이다. 헬기나 비행선에 모여드는 새들은 보편적이지만 동시에 불길하고 불가해한 존재가 되며, 붉은 지하 수로에서 마지막 결전은 로봇들끼리의 싸움인데도 불구하고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운다(적의 원격조종 로봇의 케이블을 끊는 장면 등). 이런 이미지들이, 자칫 딱딱한 모사에 머물 수 있는 테크놀러지의 재현이나 현실 정치적인 접근을, 몽환적이고 우아한 스타일의 영상으로 재조직한다.
미군의 존재를 언급하던 <공각기동대>까지 이어지던 세 줄기 구조 영화들은, 이후 오시이 영화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하나가 결여됨으로써 끊어지게 된다. 이를 테면 <입식사 열전>에서는 테크놀러지에 대한 재현이 빠졌고, <아발론>에서는 현실 정치적인 접근이 없다. 최근 각본으로 관여했던 루팡 3세 <식당의 킬러들> 에피소드에서는 신화/종교적인 이미지가 없어졌다. <스카이 크롤러> 정도가 논란의 여지가 있을만한데, 현실 정치에 대해서는 은유적인 형태로만 묘사하고 있단 점은 지적할만하다.
이 부분은 아마 각본가 이토 카즈노리와의 결별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본다(이토 카즈노리는 오시이 영화에 딱 <아발론>까지 참여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시이 영화에서 이토 카즈노리의 공헌이 더 높이 쳐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고.
정작 오타쿠 계열의 팬덤에서는 미야자키 하야오, 토미노 요시유키, 안노 히데아키(+이쿠하라 쿠니히코)는 언급되더라도 오시이 마모루나 콘 사토시는 언급이 적어지고 있는데, ‘아니메’에서 통용되던 요소들을 엮어서 이만큼까지 밀어붙인 사람이 따로 없단 점을 생각하면 아쉬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