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이윽고 네가 된다”의 예비적 독해 : 키안 일병 유골회수기

Ashihara NepuYona
31 min readDec 8, 2019

“너에게 하고 싶은 말 / 언제나 마음에 메모해두지만 /
목소리를 들으면 / 전부 잊어버리고 말아서
비밀 이야기조차 / 흔해빠진 말로 메워져 버려서 /
어떻게 하지 / 무엇을 말하지

좋아해, 이외의 말로”

— 코이토 유우(타카다 유우키)&나나미 토우코(코토부키 미나코)의 노래 “좋아해, 이외의 말로” 가사 中

0. 소개 : “유골회수기”?

이 절에서는 간단하게 이 글에 붙인 제목에 대한 설명과, 이 글의 성격에 대해서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원래 이 글의 부제는 “키안 일병 구하기”로 할 생각이었지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키안 님(이하 존칭어 생략)의 게시글을 방어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밝힐 것이지만, 키안의 독해는 빗나간 부분이 꽤 많고 그런 의미에서 확인사살까지 당한 글이나 다름없다. 그것을 굳이 꺼내어 들어 방어하는 행위는 구출작전이라기보다는 자살특공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자살특공을 할 생각도 아닌데 왜 굳이 여기서 키안의 이름을 — 그러니까, 환유적으로 그 게시글을 — 다시 꺼내어 왔는가 하는 부분에도 조명을 맞출 필요는 있을 것이다.

텍스트릿 기타 리뷰/비평 게시판에 올라왔던 관련글은 백합이라는 장르 명칭과 정의 및 장르 향유자의 성격을 논하기 위한 글이었다. 나는 여기서 정작 저본 텍스트인 “이윽고 네가 된다”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그가 갖고 온 비평의 틀인 “백합물”과 “레즈물”이라는 용어는 충분히 반박되었지만, 그러한 용어들을 통해서 전개하고 싶은 “이윽고 네가 된다” 비평에 대해서는 나는 충분한 논의가 이뤄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글은 거기서부터 하나의 가설을 세워 앞으로 글을 전개하려고 한다 : 키안의 비평은 명백히 실패했다. 하지만 그의 비평은 흥미로운 방식으로 실패했다.

우리는 그의 유골이나 사인을 분석함으로써 더 나은 “이윽고 네가 된다”의 비평을 이끌어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이 글은 본격적인 비평이나 분석이라기보다는, 키안의 유골을 통해서, 앞으로 “이윽고 네가 된다”를 독해하고자 하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지도가 되기를 소망한다. 나는 이 지도에서 대체로 엄격한 척도를 지키고자 하겠지만, 모험자들을 위한 간략한 메모나 사적인 인상을 섞을 것이고 따라서 에세이에 가까운 형식이 될 것임을 알린다. 때로는 매우 감상적이 될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이미 지긋지긋해져서 듣고 싶지 않다는 분도 있겠지만, 나는 비굴(?)하게 그 소매자락을 붙잡고 싶다. 만약 내가 단지 사적인 감상만을 남기기 위한 것이었다면, 트위터나 일기장에 대충 써갈기고 덮어도 그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게시판을 통해서 백합 장르의 비평이 더 활성화되기를 기원한다. 이 글이 불쏘시개라면, 차라리 제대로 불타기라도 바라는 것이다.

1. 질문 : 코이토 유우는 무성애자인가?

질문에 대한 답만을 원한다면 이 절을 넘겨도 좋을 것이다. 아니 이 비평 자체를 넘겨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왜 이러한 질문이 나왔는지, 그리고 왜 이러한 답이 이끌어져 나왔는지 좀 더 길게 얘기해보고자 한다.

먼저 왜 이런 질문이 나왔는가, 하는 점이다. 흥미롭게도 키안은 자신의 반박글에서 무성애를 언급한 점을 꽤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코이토 유우가 무성애자인지에 대해서는 작품에서 명확하게 말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코이토 유우가 무성애자가 아니라면, 왜 그것을 굳이 논의 내로 끌고 왔을까? 그에 따르면 “성애”와 “순정”과 “좋아함”은 세 가지 다른 위상을 갖고 있다. 그는 (스스로 이 경계가 애매하다고 말하긴 하지만) 육체적인 사랑이 동반되는 성애도 아니고, 오로지 정신적인 순정도 아닌, 그 둘로는 환원되지 않는(혹은 그 둘을 포함할 수 있는 더 광범위한) 어떤 이끌림이나 관계를 “좋아함”으로 규정하려고 한다. 그는 그러한 “좋아함”을 코이토 유우의 무성애자-성에 기대어 설명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혹여 “이윽고 네가 된다”를 읽지 않고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을 위해 간략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이윽고 네가 된다”에서는 고등학교에 입학한 코이토 유우라는 시점화자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이 코이토 유우는 자신이 연애감정을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에 답답함을 갖고 있다. 이때 학생회 선배인 나나미 토우코가 나타나고, 나나미 토우코는 자신에게 특별한 감정을 갖지 않고 완벽함을 요구하지 않는 인물인 코이토 유우로부터 사랑을 느낀다. 이 둘은 일단 사귀기로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앞으로 나나미 토우코에 대해 코이토 유우가 특별한 감정을 품지 않는다는 조건이 걸린 기묘한 관계이다.

키안이 “이윽고 네가 된다”에서 읽으려고 하는 것은, 특별히 “사랑”을 느끼지 않는 코이토 유우가 여전히 나나미 토우코를 신경쓰고 돌보려고 하거나, 혹은 바꾸려고 하는 데서 발현되는 어떤 관계성이다. 키안에 따르면, 그것은 “로맨틱”하지만 “섹슈얼”하지는 않다. 그것은 어떤 용어로 환원할 수 없는 “좋아함”이다(이는 어쩌면 키안 자신이 무성애자라고 밝혔던 것에서 비롯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우리는 여기서 “2019년 11월 27일에 발매된 “이윽고 네가 된다”의 완결편인 8권에는 장장 15페이지에 걸쳐서 성애장면이 나오는데, 이것은 코이토 유우가 먼저 요구한 것입니다”라고 일언지하에 끊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역시 좀 지름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첫째로 키안의 글은 11월에 올라온 것도 아니고, 둘째로 나중에 그가 밝혔듯이 TV아니메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나는 여기서 약 5권(24화)까지의 스토리를 다룬 TV아니메의 시점에서도, 여전히 코이토 유우가 무성애자가 아님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또다른 등장인물인 마키 세이지의 존재이다. 마키 세이지는 코이토 유우와 나나미 토우코가 속해있는 학생회의 남학생으로, 타인의 연애 이야기를 듣거나 상담해주는 것은 좋아하지만 본인이 직접 연애를 하고 싶지 않은 캐릭터로 등장한다. 이후 마키 세이지는 코이토 유우와 나나미 토우코의 관계를 알게 됨으로써 이야기에 조금씩 관여하게 된다.

마키 세이지는 존재만으로 좀 흥미로운 캐릭터라 그에 대해 몇 가지 언급을 하도록 한다. 먼저 마키 세이지는 ‘협박’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윽고 네가 된다”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우리는 여전히 동성연애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발설되는 것만으로도 사회에서 “불쾌한 압력”을 받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만약 현실고발을 베이스로 한다면 마키 세이지가 협박하게 만드는 편이 더 편했을 것이다. 또한 작극적인 측면에서 생각하면, 비밀연애의 전제를 흔들거나 이를 발설하고자 하는 캐릭터의 존재는 쉽게 서스펜스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작가 니카타니 니오는 그렇게 설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키 세이지는 꽤나 적극적인 협력자로, 코이토 유우의 등을 밀어주는 역할로 등장한다(그의 영악해보이는 캐릭터 디자인과는 달리 말이다!).

그럼 왜 마키 세이지란 캐릭터가 존재해야하는가?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코이토 유우와의 대조를 위해서다. 마키 세이지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코이토 유우는 무성애자인 마키 세이지와는 다른 역할을 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마키 세이지는 여러 번에 걸쳐서 코이토 유우와 자신이 다름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윽고 네가 된다” 만화판 7권에서는 아예 직접적으로 코이토 유우에게 말하지만, 애니메이션에도 등장한 체육대회편에서도 분명히 “너와 나는 다르다”고 나레이션을 하고 있다. 키안은 무성애자나 데미 섹슈얼의 퀴어성에 초점으로 이야기를 하고자 했지만, 정작 마키 세이지의 이러한 형태의 지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것은 물론 코이토 유우를 무성애자 혹은 적어도 무성애자가 맺는 관계성의 대변자로 만들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로, 이것은 좀 사담에 가깝지만, 나는 마키 세이지란 존재가 “백합을 읽는 남성독자”를 간접적으로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남성독자인 나는 마키 세이지가 연극을 보는 듯이 남의 연애사를 본다는 독백에서 귀가 새빨개졌는데, 그건 거의 작가 니카타니 니오가 내 귀에 대고 “네 이야기야 인마, 너라고 너”라고 속삭이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픽션은 대리체험인 성격을 갖고 있으며 그렇기에 남의 인생을 엿보는 관음증적인 측면이 있다고 비아냥거릴 수는 있겠다. 그러나 스스로 연애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연애를 ‘보는 것’으로 만족하는 인간의 어떤 일그러진 성격을 드러내기 위해, 니카타니 니오가 그를 등장시켰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그가 최고의 시나리오를 바로 곁에서 볼 수 있다며 히히덕거리는 묘사는 역시 흥미본위의 관음증적인 태도가 아닌가. 물론, 그가 그러한 성격만으로 머무는 캐릭터는 아니지만, 특정 독자들의 존재와 그들의 관음증을 환기시키는 점은 여전히 흥미로운 측면이다.

이야기를 다시 본론으로 돌리자. 마키 세이지의 등장으로, 우리는 코이토 유우가 무성애자가 아니며 또한 이것이 무성애자가 관계를 맺는 방식을 중심으로 묘사하는 작품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대체 이 작품은 무엇을 다루고 있는가? 그것은 물론, 사랑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사랑”이라는 규범과 그로 환원되지 않는 사랑에 대한 만화이다. 다음 절에서는 다른 것보다도 규범에 좀 더 초점을 맞추어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2. “사랑”이라는 역사적 규범에 대하여

2.1 나나미 토우코와 빌둥스로망

1절의 결론을 읽고, “아니 그렇다면 키안의 이야기와 이 글이 어떻게 다른가?”하고 묻는 독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소개에서 언급했듯이, 이 글은 키안의 비평이 아주 흥미로운 방식으로 실패했다고 전제하고 있다. 첫 질문에 대해 답부터 먼저 말하면 그는 ‘환원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나와 생각을 공유하지만, 그렇다면 주로 ‘무엇’에 환원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고찰을 하고 있다. 더 상세하게 논하기 위해 그의 글의 일부를 다시 한 번 살펴보자.

“어떤 정체성이 자신의 진짜 모습인지를 고민하고 있는 주인공(나나미)에게, 작품을 만들어가는 이들은 말해줍니다. (중략) 이러한 좋아함이 있고 저러한 좋아함의 형태가 있지만, 그것은 모두 좋아함이며 또한 그것들로 환원되지 않는 ‘지금의 좋아함’이 있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

나나미 토우코는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코이토 유우의 선배로 말하자면 완벽한 인간이다. 전교 1등은 놓친 적 없으며, 학생회 활동에 열심일 뿐 아니라, 학생회에서 회장을 맡을 정도로 리더십도 좋다. 뭐, 덧붙이면 외모도 환상적이라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다시는 연애는 신경쓰지도 않겠다는 사에키 사야카도 반하게 할 정도다. 주변사람들은 대체로 이것이 그녀의 자연스러운 성정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나나미 토우코는 ‘죽은 언니 같은 완벽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지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타인이 자신을 특별하게 봐주기를 원하면서도 동시에 거기서 편안함을 느끼지 못한다.

나나미 토우코는, 말하자면 “이윽고 네가 된다”의 “제 1스테이지다. 그녀는 ‘언니’라는 규범에 사로잡혀 있다. 그녀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성립하기보다는 — 그것의 원인이 죄의식이든 미성숙함이든 — ‘언니’라는 알기 쉬운 역할을 연기하는 것으로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그녀에게 결정적인 위기가 찾아오는 것은, 그러한 규범을 제대로 연기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 규범이 실은 스스로가 만들어낸 환상이었다는 데서 비롯한다. 작중에서 나나미 토우코는 ‘언니’가 하지 못했던 문화제 연극을 자신이 화징일 때에 이루고자 하는데, 그 때 연극고문으로 찾아온 언니의 동기로부터 언니가 그렇게 완벽한 인간은 아니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여기서 학생회의 연극 줄거리인 “기억을 잃고 깨어난 여성이 자신에 대해 전혀 다른 진술을 하는 주변인물들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일으킨다”는 내용과, 나나미 토우코의 상황이 완벽한 평행을 이루게 된다.

그런데, 만약 키안의 글처럼 “그것은 모두 좋아함”이고, “그것들로 환원되지 않는 ‘지금의 좋아함’”을 긍정한다면 왜 원래의 연인과 그대로 연인으로 남고자 하는 결말은 작중에서 폐기된 것일까? 만약 연극 속 여자 / 나나미 토우코가 ‘지금의 나’라는 정체성을 받아들인다면, 지금까지 연기해온 사실을 다시 긍정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작중에서는 (각본의 새 결말을 생각한) 코이토 유우에 의해서 이 질문들에 대답이 주어진다. 만야 그러한 결론이 내려진다면 “과거를 기준으로 해서 결말을 이끌어냄”으로써, “극의 의미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조금, 이 글의 방향과는 맞지 않는 ‘취미’의 얘기를 하고자 한다. 소설이 등장하기 이전의 전근대적인 서사(민담이나 설화, 신화 등)는 대체로 순환적인 시간관을 다루고 있다. 사계절이 다시 돌아오고, 생노병사가 반복되듯이, 어떤 불균형이 생기더라도 기존의 균형상태를 되찾기 위해서 돌아가는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말하자면 세계관이며, ‘질서’이다. 이러한 서사 속에서는 세계, 정확히 말하면 세계를 통제하는 질서 쪽이 압도적으로 강력하기 때문에 개인은 그 질서의 역할로만 존재할 뿐 딱히 개개의 내면을 갖을 이유가 없다…고 게오르그 루카치가 ‘총체성’ 개념으로 주장한 바(게오르그 루카치, 소설의 이론) 있으며, 문예평론가 미하일 바흐친의 용어를 빌리자면 ‘로망스에서 모험의 시간’이다. 그러나 새로운 서사형식인 소설(novel)은, 이러한 세계의 질서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다. 소설은 이미 그러한 ‘총체성’이 깨진 이후에 어떻게 이를 회복할 것인가 되묻는 근대에 제작되었기 때문이며, 대표적인 형태가 성장소설을 가리키는 교양소설/빌둥스로망이다, 물론, 문예평론가 미하일 바흐친에 따르면 빌둥스로망이라고 해서 모든 작품이 순환적인 시간관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고, 벼가 자라 수확을 하고 다시 씨를 뿌리듯이 당연히 개인이 어른으로 성장하게 되는 작품들(협의의 교양소설의 크로노토프)도 존재한다. 그러나, 루카치가 주장하는 근대문학이나 미하일 바흐친이 주목하는 빌둥스로망은 그러한 종류의 서사를 가리키지 않는다. 그들이 주목하는 새로운 정체성의 획득, 이를 통한 새로운 질서를 성립시키는 서사 — “실제 역사적 시간을 흡수하며, 세계를 주어진 것으로 파악하는 게 아니라 실제 특정한 사람들의 삶에서 인간의 노력에 의해 창조되는 것”(미하일 바흐친, 교양 소설과 리얼리즘 역사에서 그 의의)으로, 쉽게 말하면 코이토 유우의 발언과 같은 것이다.

내 ‘취미’가 이 글에 적용된 것은 내 개인의 지식을 뽐내기 위해서도 아니고, “이윽고 네가 된다”가 근대문학이며 빌둥스로망의 문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특히 빌둥스로망으로만 “이윽고 네가 된다”를 규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좀 더 논의해볼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여기서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우리가 여기서 “키안 일병의 유골”을 분석하고자 하며, 이러한 전범들에서 쓸만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이윽고 네가 된다”는 바로 먼저 주어진 ‘규범’을 바탕으로 정체성을 수동적으로 성립하기 거부하는 작품이라는 데에 있다. 마치 빌둥스로망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그에 비하면 키안의 주장은 그러한 적극성을 포착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미리 소여받은 것으로써 어떤 관계성들을 규정하고, 그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관계가 ‘있음’만을 주장하고 있다.

2.2. 사에키 사야카와 성애

나는 나나미 토우코의 서사를 제 1스테이지라고 규정했는데, 왜냐하면 그녀의 서사는 여러가지 ‘규범’들 중에서 특히 ‘언니’라는 매우 개인적인 롤 모델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하일 바흐친 선생의 말을 빌려 “실제 역사적 시간을 흡수”한 쪽이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코이토 유우의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코이토 유우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우회로로 사에키 사야카의 이야기부터 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사에키 사야카는 코이토 유우의 또다른 선배로, 고등학교 이 입학 때부터 나나미 토우코와 친구였으며 비밀스럽게 그녀를 연모하는 캐릭터이다. 이 캐릭터에게 좀 미안한(?) 얘기지만, 사에키 사야카의 경우는 비교적 알기 쉽고 말하자면 제 2스테이지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랑”이라는 규범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을 밝히기 위해서는 큰따옴표를 친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자세히 밝힐 필요가 있겠다.

물론, 이것은 키안이 지적한 바와 같이 서양의 근대적 개념, 역사적인 개념으로써 “성애”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랑”이란 근대의 섹슈얼리티와 로망스를 가리킨다. 이 글에서는 섹슈얼리티에 관해서는 우에노 치즈코의 관점을 따르도록 한다. 우에노 치즈코의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는 널리 읽힌 책이지만, 그 중에서도 역사적인 작업에 좀 더 주목하고자 한다. 우에노 치즈코에 따르면 그의 작업은 “나의 과제는 섹슈얼리티를 역사화하는 것, 즉 탈자연화 denaturalize 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조금 길지만 그대로 인용해보고자 한다.

“섹슈얼리티가 폭력 혹은 가학에서 애착과 친밀함까지 폭넓은 스펙트럼을 가진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섹슈얼리티에 ‘본질’이란 없다. 즉, ‘성은 원래 공격적인 것이다’라든가 ‘성은 친밀함의 표현이다(표현이어야 한다)’라는 것은 규범적인 명제에 불과하다.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은 어느 특정한 역사적 맥락에 있어서 성이 특정한 무엇인가와 특권적으로 결합되는 개연성에 머문다. 그리고 푸코가 시사하고 내가 그의 방식을 따라 사용하는 ‘권력의 에로스화’란 근대가 에로스를 비대칭적 젠더 관계, 즉 다름 아닌 권력 관계와 연결시켰다는 현상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그리고 젠더가 권력관계의 용어라고 하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우에노 치즈코,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나일등 옮김, 은행나무, 2017, 295쪽~296쪽. 강조 필자.)

그렇다면 이 특정한 역사적 맥락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물론 “정통성을 부여받은 이성애 커플인 ‘부부’의 성애”가 특권화된 19세기 부르주아적 맥락이다. 가부장제는 전근대에도 존재했지만, 우에노에 따르면, 성애와 가부장제가 강하게 결합된 지금의 형태로 존재하기 시작한 것은, 위에서 말한 ‘총체성’이 상실된 이후 — “신을 대신해 신의 자리에 자연을 대입한 근대”부터다. 우에노 치즈코는 이어서 푸코를 다음과 같이 독해한다. 성(애)은 이렇게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갇히게 되었으며, 동시에 그러한 사적화 Privatizaiton 를 통해서 “금지와 명령은 한 쌍의 세트가 되어 성을 특권화하고, ‘어떠한 성행위를 하는가’가 그 사람의 인격을 나타내는 지표가 된다”(우에노 치즈코, 289쪽).

그렇다면 사에키 사야카의 경우는 어떠한가? 물론, 사에키 사야카는 레즈비언으로 “정통성을 부여받은 이성애 커플”이 될 수는 없다. 사에키 사야카는 과거에 동성의 선배와 사귀었지만, 선배는 그것을 “한 때의 헤메임”으로 치부하거나 심지어는 혹여 여자를 좋아하게 되었다면 “자신의 탓”이며 “평범한 아이”로 돌아가기를 바란다고 이야기한다. 선배는 완강한 우리 사회의 “사랑” 쪽에 서있다. 그녀에게 있어 “사랑”이란 평범하게 남녀가 사랑하여 결혼하여 섹슈얼리티한 관계를 갖는 것이고, 그것의 예외는 ‘한때의 헤메임’이나 비정상으로 치부되는 것에 불과하다.

(사적인 감상을 늘어놓자면 역시 여기서 사에키 사야카가 ‘잘 가세요さようなら’라며 선배에게 보란듯이 자신의 관계를 자랑하는 장면에 통쾌했던 독자가 한 둘이 아닐 것이다)

바로 그러한 점에서 사에키 사야카는 “사랑”이라는 규범에서 벗어나 있는 예외적 존재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우에노 치즈코가 설명하듯이, 그녀는 그녀의 성적지향 하나로 ‘평범한 아이’로부터 벗어난 것으로 인식되는, 오로지 그것만으로 그 정체성이 지어지는 상황에 놓여있다. 이러한 점에서 사에키 사야카가 비교적 알기 쉽다고 이야기한 것에 반박하고자 하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또다른 측면에서는 여전히 그녀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과 멀지 않다. 그것은 방금 전에 언급한 로망스의 문제이다.

로망스가 젠더나 섹슈얼리티의 문제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음은 충분히 알 수 있다. 적어도 우리가 말하는 “사랑”의 로망스라면 그렇다. “이윽고 네가 된다”는 코이토 유우의 다음과 같은 내레이션과 함께 1화를 시작하고 있다.

“순정만화少女漫画나 러브송의 말들은 / 반짝이고 눈부셔서 / 의미라면 사전을 펼치지 알아도 알겠지만 / 나의 것이 되주지 않는다”

여기서 “순정만화나 러브송의 말들”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사랑”의 로망스가 발현된 언어들이다. 우에노 치즈코는 로망스에 대해서는 다루지는 않지만, 우리는 그가 에로스에 대해서 언급한 점에서 이를 유추할 수 있다. 낭만주의가 특정한 질서를 반복할 뿐인 고전주의를 벗어나 인간의 가능성을 무한히 여기고 그 감정을 특별한 것으로 취급했던 것처럼, 낭만적인 “사랑”은 ‘필설로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것’이 된다. 그것을 단적으로 말하면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첫눈에 반하여 특정한 감정에 돌입하는 것’이다. 단, 그것은 매우 특별한 것이지만 동시에 나이가 들면서 획득하기 마련인 매우 ‘자연스러운’ 감정중 하나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우에노 치즈코가 언급했던 “신을 대신해 신의 자리에 자연을 대입한” 근대를 반복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실상은 우에노 치즈코가 “에로스란 ‘문화적 발정 장치’이기 때문에 지성과 교육이 필요하게 되는 것”(299쪽)라 했던 것처럼 로맨스도 교육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적화 Privitization 를 통해 개개인의 정체성으로 환원되며, 공적인 정치/언어의 영역에서 추방하여 설명할 수 없는(=자연스러운) 현상으로 귀결된 것에 불과하다(다시 한 번 코이토 유우가 “순정만화나 러브송의 말들”을 배우려고 한 것을 떠올리라.)

그렇게 볼 때 사에키 사야카는 비록 동성애자이지만 “사랑”의 로망스에서는 크게 벗어나지 않은 인물이다. 고교 인생설계를 처음 본 동기 얼굴 하나에 치여서 전부 폐기하고 “모든 것이 아무래도 좋아졌다”고 말할 정도면, 그건 분명 낭만적인 인물이다. 물론 그녀가 바로 그 동성애자인 한에서, 우에노 치즈코가 설명하는 섹슈얼리티와 젠더적인 권력관계 — “남자는 소유하고 여자는 보호받는다” — 가 그대로 성립할 리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러한 로망스라는 운동을 활성화하는 데 있어서 두 사람이 모두 여자로 바뀐 것을 제외하고는 “사랑”의 범위에 벗어나지 않는다. 나는 여기서 현실에서 레즈비언 여성이 “사랑”의 규범으로부터 벗어나서 “불쾌한 압력”을 받는 일에 대해서 별 것 아니라는 식으로 이야기할 생각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다. 그것이 직접적 피해이건 혹은 간접적인 평판의 문제이건 간에, 그것은 권력구조에서 비롯된 중대한 문제이며 또한 헤테로 시스젠더 남성인 내가 그 고통에 대해 감히 이렇다 저렇다 평가할 일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이윽고 네가 된다”라는 작품을 분석함에 있어서, 그것이 다루려는 테마의 케이스 스터디란 점에서, 사에키 사야카라는 캐릭터가 좀 더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문제를 안고 있음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이다.

나는 키안이 ‘레즈물’이라는 용어를 꺼내온 것은 여기서 비롯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 근대적인 섹슈얼리티와 로망스가 결부되어 있는 “사랑”의 개념에서 사에키 사야카는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게다가 사에키 사야카는 본인 입으로 토우코의 가장 좋은 점은 ‘얼굴’이라는 소리도 하는, 섹슈얼리티나 에로스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드러내놓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키안이 제시하는 “순정” 혹은 “좋아함” 개념에는 들어맞지 않는 인물이며, 이는 ‘어른 레즈비언들’의 이야기를 주로 다루는 ‘레즈물’에 속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어른’이라고하는, 특정한 ‘규범’이나 ‘질서’에 부합하는 어떤 인물상이 제시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규범에 들어맞지 않을 경우에는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섹슈얼리티가 결여된 어떤 특별한 관계나 감정으로써 특별하지만, 동시에 미성숙한 것, ‘여학생의 것’으로 처리된다. 그리고 그것이 “순정”이 된다는 것이 키안의 설명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분석에 따르면 여전히 키안의 “사랑”에 사에카 사야카는 들어맞지 않는다.

물론 키안은 이러한 “사랑”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으며, 또한 “순정”을 전긍정하지도 않는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좋아함”에는 더 많은 층위가 있으며, “사랑”과 “순정”을 나란히 늘어놓음으로써 그러한 겹겹히 쌓여있는 레이어를 단번에 보여주는 작품으로 “이윽고 네가 된다”를 파악하려고 하고 있다(“ 즉 <야가키미>는 ‘백합’이라는 단어로도 ‘레즈’라는 단어로도 환원되지 않는, ‘ 좋아함’의 여러 형태를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 ). 말하자면 그가 행하려고 하던 것은 “이윽고 네가 된다” 독해를 통한 “사랑”과 “순정” 이분법의 해체작업인 셈이다.

우리는 이미 이 게시판에서 여러 번 yora님이나 이브나 님 등의 “백합”이라는 장르 분석과 반박을 통해, 애초에 “사랑”과 “순정”이 그렇게 단순하게 규정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리고 또한 이 글에서 지금까지 분석을 통해서 키안이 “사랑”이나 “순정”, 혹은 “좋아함”을 소여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을 뿐 시간을 동반한 역동성은 결여되어 있으며, 사에키 사야카의 사랑이 비교적 “사랑”이라는 규범에 가깝게 있다는 이유로 그 세 개념의 분절 기준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해체 작업’은 꽤나 무의미한 것이다. 그의 구분 자체가 적어도 “이윽고 네가 된다”라는 작품 안에서는 무의미한 구분이거나 오독에 근거하면 분류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그의 비평은 명백하게 실패했다. 그러나, 바로 “사랑”의 해체를 시도하려는 점에서 그의 실패는 매우 흥미롭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아직 코이토 유유라는 케이스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3. 좋아해, 이외의 언어로

3.1 코이토 유우의 사랑에 대하여

이야기를 갑자기 좀 가벼운 방향으로 돌리고자 한다. 내가 키안의 글을 읽고 나서 가장 놀란 것은 “백합물”과 “레즈물”의 규정따위가 아니었다. 솔직히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아니, “이윽고 네가 된다” TV애니는 완전 에로스의 폭력이었는데 뭔 소리여!”였다. 정말이다, 내게 “이윽고 네가 된다”에서 TV애니메이션을 본 뒤의 정해진 일과란 원작만화를 꺼내서 원래 이 부분이 이렇게 야했나 하고 몇 번이나 확인하는 것이었을 정도다. “이윽고 네가 된다”의 TV 애니메이션은 후반부의 일부 에피소드를 제외하고서는 원작으로부터 그 내용은 큰 변화를 주고 있지 않다. 그러나, 연출 부분에서는 확연히 차이가 있으며, 모든 면에서 좀 더 드라마틱하게 바뀌었다. 그리고 그것은 물론 스킨십 장면, 성애 장면도 마찬가지였다. 성우의 연기가 들어갔기 때문에도 있겠지만, 사운드 디자인이나 물기 어린 표정, 꽤 긴 시퀀스 시간 등등 누가 봐도 ‘에로틱’하게 만들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오히려 “아니 그렇게 서로 껴안고 딥키스도 하면서 무슨 두근거리지 않고 어쩌구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야?”라고 생각했을 정도다.

그렇다, “이윽고 네가 된다”의 코이토 유우는 여러번 에로틱한 체험을 한다. 방과후의 체육창고에 둘만 남아서 딥키스라던지, 둘만 남은 집에서 침대 위 스킨십이라던지, 누가 봐도 명백히 에로한 장면이다(물론 우에노 치즈코 선생께서 말했듯이 “에로스란 ‘문화적 발정 장치’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은 학습한 적 없는 사람에겐 에로틱하지 않을 것이란 분들의 의견은 겸허히 존중하겠다). 단, 코이토 유우는 그것을 자신의 감정으로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나는 그것이 나나미 토우코와의 조건을 위반하는 것이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그것이 위에서 말한 “사랑”의 규범과 딱 들어맞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니, 그렇지만, “이건 내 심장 소리가 아니라 선배의 심장소리다. 만약 그렇다면 너무 빠르기 때문이다” 같은 나레이션을 보면서,어떻게 코이토 유우가 에로틱한 경험을 하지 않았고 섹슈얼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단 말인가?

누가 봐도 자기 심장이 터질 것 같아서 미쳐버리겠다는 표현을 부정형으로 한 것에 불과하지 않나 이 말이다! 특히 애니판을 주로 분석했다면서 어찌 그럴 수가 있나!

자, 장난스러운 잡담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자. 그러나, 이 잡담이 단지 글의 흐름을 유연하게 위해서만 꺼내온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 절에서 코이토 유우가 품고 있는 갈등을 분석함으로써 “이윽고 네가 된다”가 전달하고 있는 테마에 좀 더 깊숙이 들어가고자 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나는 미하일 바흐친이 말한 “실제 역사적 시간을 흡수하며, 세계를 주어진 것으로 파악하는 게 아니라 실제 특정한 사람들의 삶에서 인간의 노력에 의해 창조”하는 인물로 코이토 유우를 파악하고 있으며, “이윽고 네가 된다”를 독해하는 데 있어서 코이토 유우가 최종 스테이지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키안의 분석과 달리, 코이토 유우가 경험하는 것은 분명히 섹슈얼하고 에로틱한 체험들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코이토 유우가 무성애자적인 입장에 서있는 것도 아니다. 코이토 유우는, 사랑의 순간들을 경험하면서도, 그것들이 “사랑”이란 규범에 부합하지 않기에 앞으로 어떻게 나나미 토우코와 관계지어야할지 확신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작중 전개에서도 그렇고, 이후 만화판의 완결에서도 그렇지만, 코이토 유우가 경험하는 사랑은 — 키안이 말하는 “좋아함”은 — 분명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첫눈에 반하여 특정한 감정에 돌입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은근한 불에서 더 천천히 끓어오르는 감정에 가깝다. 코이토 유우가 그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오히려 사랑을 알기 위해서 순정만화나 러브송의 “사랑”의 말을 그 모범으로 삼아버렸기 때문이다.

3.2 사랑을 탈환하기 위해

우리는 여기서 잠시, “사랑”과 사랑, 그리고 “좋아함”의 구분에 대해서 이야기할 필요가 있겠다. 나는 이 글에서 계속해서 “사랑”과 사랑을 나누어서 사용하였다. 그리고 2.2절에서 분명하게 “사랑”이란 근대적인 가부장제 하에서 형성된 섹슈얼리티와 로맨스를 총칭하는 것, 혹은 거기서 비롯된 역사적인 규범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렇다면 사랑은 무엇이고, 키안이 말하는 “좋아함”과는 어떻게 다른가? 키안에게 있어서 “좋아함”이란 “‘백합’이라는 단어로도 ‘레즈’라는 단어로도 환원되지 않는” 잉여적인 개념을 나타낸다 그리고 나의 경우에는 “사랑”이라는 근대적인 규범을 포함하되, 그 뿐 아니라 모든 형태의 사랑을 큰따옴표 없이 사랑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키안의 “좋아함”이 오로지 부정형으로만 나타난다면, 나의 사랑은 “사랑”의 좀 더 광의적인 / 상위적인 개념으로 존재하고 있다.

나는 키안이 “좋아함”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 다분히 “유리쿠마 아라시”의 “좋아함 好き”을 의식하고 있지 않은가 의심하고 있다. “유리쿠마 아라시”에서는 이지메나 배척주의를 “투명한 폭풍”이라고 부른다거나, 사랑을 “좋아함”이라고 부르는 식으로 기존의 개념을 명확하게 지칭하기를 꺼리고 있다. 우리가 “유리쿠마 아라시”의 개념어나 그것의 활용을 적극적으로 분석하기에는 지면이 부족하니, 여기서는 왜 “유리쿠마 아라시”가 그러한 식으로 우회어를 사용하고 있는지에 대한 나의 추측만을 쓰고자 한다. 이쿠하라 쿠니히코는 ‘유리쿠마 아라시 공식 스타팅 가이드’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 바 있다.

“예를 들면, 사랑에 대해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합시다. 지금, 남녀 캐릭터로 연애를 그리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이라는 것 자체가, 남녀의 관계로 그리려고 하면, 이미 ‘네타’(ネタ)가 아닙니까? (중략)

하지만 백합이라는 장르에 뛰어들어, 은유로서 여러가지를 표현하면, 사랑은 아주 그리기 쉽습니다. 현대에 사랑을 그리려면 백합이라는 장르는 아주 좋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출처 http://alonestar.egloos.com/5409151 )

네타는 ‘소재’, ‘건더기’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말하자면 ‘이미 쉽게 사용되고 있는 클리셰’의 의미로 쓰였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사랑’을 남녀 캐릭터의 연애로 그리면 이미 ‘네타’가 되어버린다고 적고 있다. 달리 말하면 그가 사랑을 그리려고 할 때 기존의 헤테로 이성애자들 관계로 그리면 필연적으로 “사랑”에 오염되어버린다는 뜻이다. 손쉽게 “사랑”이라고 써붙여 내세우는 순간에 역시 그것은 낡고 닳은 시시한 개념이 되어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있는 백합 장르를 통해서 사랑을 그릴 수 있는 것이며, 동시에 “좋아함” 같은 우회어를 통해서 “사랑”이 되지 않는 사랑들을 그리고자 한 것이다. 그렇기에 때로는 연인간의 격렬한 사랑이기도 하고, 타인을 위한 희생이기도 하며, 죄를 인정하거나 용서하는 것이, “유리쿠마 아라시” 내에서 “좋아함”이라는 용어로 설명하고 있다.

나는 이러한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아니, 오로지 조건부로만 동의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사랑이라는 언어를 “사랑”의 독점으로부터 탈환해야 한다고 전제할 때, 나는 “사랑”으로부터 일시적 도피처로 존재하는 “좋아함”이라는 언어를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도피처에 불과하다. 나는 조지아 맥스 캔커피를 좋아하지만 조지아 맥스 캔커피를 사랑하지는 않는다. 나는 내 동생을 썩 좋아하지는 않지만 사랑하고 있다. 호불호로 무엇을 좋아한다는 것과 그것을 사랑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물론 사랑에는 “사랑”을 포함하여, 가족 간의 사랑, 연인 간의 사랑, 사회 공동체에서 나눠지는 사랑, 그 외에 여러가지 사랑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사랑을, “좋아함”으로 두는 것만으로 “사랑”의 독점을 ‘해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순정”을 바탕으로 본 “백합물” 같은 키안의 다른 단어들처럼, “사랑”에 해당하지 않는 다른 사랑들을 나누어 격리하는 울타리 이상의 것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국 “사랑”의 독점적 위치를 공고히 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주장들이 전부 “이윽고 네가 된다”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것은 내가 “사랑”이란 말들로부터 사랑을 탈환하는 여정이야 말로 코이토 유우의 여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TV 애니메에서는 코이토 유우가 연극의 각본을 바꾸는 것에 끝나고, 만화판에서는 이후에 몇 가지 사건을 더 거쳐서 코이토 유우와 나나미 토우코가 둘이 연인이 되는 것으로 끝맺고 있다. 나는 TV 애니메의 결말도, 어느 정도 합당한 결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그것은 열린 결말로, 분명 TV 시리즈로서 방송홧수나 원작의 진행상황과도 관계되어 있을 것이며, 그 뒤에 코이토 유우나 나나미 토우코가 어떠한 변화를 겪고 어떠한 인물로 성장하게 될 것인지, 혹은 어떤 관계가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루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윤리적인 결말이기도 하다. 우리가 어떤 관계의 결말까지 그리게 된다면 역시 그 관계는 그러한 결말로 고정되어 버린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코이토 유우와 나나미 토우코의 사랑은 그런 고정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많은 관계들 안에서 서로 영향을 끼치고 서로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변화에 코이토 유우가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이라고 결심하며, 또한 나나미 토우코로부터 그러한 변화의 예감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좋은 결말이라고 생각한다. 작품의 방점이 결과가 아니라 변화에 찍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화판의 결말이 좀 깔끔하지 못하기는 해도, 훨씬 더 흥미로운 서사를 진행시키고 있음도 부정할 수 없다. 6권 이후 코이토 유우 — 나나미 토우코 — 사에키 사야카의 관계가 매우 복잡하게 얽혀서 진행이 되기 때문이다. 연극이 끝난 이후에 코이토 유우는 나나미 토우코에게 좋아하고 있다고 고백하지만, 나나미 토우코는 당황하여 “미안하다”고 대답해 코이토는 이를 거절의 의미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코이토 유우가 위축된 사이에서 사에키 사야카는 다른 어른들의 조언을 받고 먼저 나나미 토우코에게 고백하게 된다 … 고만 줄거리를 설명하면, 삼각관계를 이용하여 억지로 전개를 늘리는 전형적인 수법이라고 냉소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재미있는 것은, 그 안에서 계속 전달되는 말들의 문제이다.

사에키 사야카는 나나미 토우코에게 고백하지만, 나나미 토우코는 코이토 유우의 고백 때와는 달리 꽤 명확하게 거절의 의사를 전달한다. 여기서 사에키 사야카는 그것이 코이토 유우의 존재 때문임을 알고 깔끔하게 납득한다. 왜냐하면 코이토 유우는 나나미 토우코를 적극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한 발 더 밀어넣었기踏み込んだ” 때문이다. 그리고 사에키 사야카는 그런 식으로 변화할 수 있는 것을 사랑하는 것, 특정한 성질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를 인정하고 신뢰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나나미 토우코에게 전달한다. 이후에 나나미 토우코는 바로 그 말을 받아서 위축되어 있는 코이토 유우에게 다시 전달한다. 즉, “특별한 감정을 느끼지 말 것”이라는 금지조건 — 규범을 세웠던 나나미 토우코 자신이 바로 그것을 위반함으로써 코이토 유우에게 고백한다.

만약 TV 애니메처럼 코이토 유우가 나나미 토우코를 변화시키려는 이야기였다면,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만, 역시 일방적인 “구원”의 이야기가 된다. 좀 더 먼저 어른이 된 코이토 유우가 나나미 토우코를 스스로의 강박으로부터 구하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나 만화판은 그러한 형태를 취하는 것을 거부하고, 좀 더 구구절절하더라도 일종의 언어의 순환을 그리고 있다. 사에키 사야카는 코이토 유우의 행동이나 다른 어른들의 조언을 통해서 나나미 토우코에게 사랑의 언어를 전달한다. 그리고 나나미 토우코는 그것을 받아서 다시 코이토 유우에게 전달한다. 그것은 바로 미하일 바흐친이 말한 “인용”의 효과이다. 그것은 단지 똑같은 언어가 똑같은 의미를 담아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인물을 통해서 여러 뉘앙스를 담아 동시에 여러 의미를 담아 전달되는 언어의 한 형태이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의 존재가 여러 모습으로 변화하지만 역시 그 사람이듯이. 나는 그것이 “사랑”을 뛰어넘은 사랑의 언어, 혹은 “사랑”으로부터 사랑을 탈환한 언어라고 생각한다.

코이토 유우와 나나미 토우코가 연인이 되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역시 그들은 “사랑”이란 역사적 규범 바깥의 존재이고, 타인들이 사랑을 얘기할 때 코이토 유우는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손쉽게 전달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회를 같이 살아가지 못할 정도로 비참한 존재들도 아니다. 1절에서 장장 15페이지에 걸친 성애 묘사~ 같은 이야기를 했지만, 나는 그것이 완결편의 가장 마지막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중간에 위치한 것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에로스는 분명 관계를 쌓는데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렇지 않은 일상 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쌓여가는 행동과 말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관계를 확인하며, 또한 우리의 관계를 변화시켜 나간다. 우에노 치즈코가 말했듯이 “에로스와 권력이라고 하는 서로 다른 것을 서로 다른 채 분리해 두고 권력을 원래의 장소에 되돌려 놓고 에로스를 더욱 다양한 형태로 충만시키는 일”을, 또 미하일 바흐친이 말했듯이 “세계를 주어진 것으로 파악하는 게 아니라 실제 특정한 사람들의 삶에서 인간의 노력에 의해 창조”하는 일을, 코이토 유우와 나나미 토우코는 일상으로 살아감으로써 행해가고 있을 것이다.

[진짜 최종수정 2019.12.10. 20:00]

Originally published at http://textreet.net on December 8,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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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hihara NepuYo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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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Ashihara NepuYo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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