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전파대전 : 마음의 연애부적응

Ashihara NepuYona
8 min readJul 3,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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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오타쿠들은 연애를 못 하는가?” 라면, 역시 좀 멍청한 질문 같을지도 모르겠다. 연애의 주체나 대상으로서의 오타쿠에 대한 일반적 인식은, 그들을 소재로 한 <전차남>이나 <현시연>등의 픽션, 또는 <리얼충 선언> 같은 연애지침서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자신만의 취미 세계에 빠져 있고, 타인과의 접촉에 공포를 느끼며, 의사소통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비대한 자의식으로 벽을 만들고 있는, 그리고 결정적으로 최소한의 자기관리가 결여된 인간이라고 하면 얼추 들어맞는 이미지 아닐까? 이런 사람들이 섬세한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한 관계에 잘 적응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거다.

생각해보면 오타쿠들이 연애에 대해 이야기할 때 역시, ‘안생겨요’ 내지는 ‘2차원 와이프’처럼 자학적 유머의 레벨에서 다루는 경우는 많아도, 연애부적응이라는 사실 자체에 진지한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것은 아마도 위와 같은 설명을 모두 무의식적으로 납득하기 때문일 것이다. 오타쿠의 연애 낙오는 현실의 문제지만, 동시에 누구나 그 내막을 뻔히 아는 문제인 것이다. 나 역시 비슷한 이유에서, 오타쿠로서 살아 온 대부분의 시간 동안 이 주제에 대해서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랬던 내가 ‘오타쿠의 연애’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인식하게 된 것은, 혼다 토오루의 오타쿠 대담집 <전파대전(電波大?)>을 읽은 경험이 그 첫 계기였다.

<전파대전(오오타 출판, 2005년)>

일본 현지에서는 2005년에 발간된 <전파대전>은, 만화 원작자이자 평론가인 타케쿠마 켄타로, ‘오타킹’ 오카다 토시오, <NHK에 어서 오세요!>의 타키모토 타츠히코, <R.O.D.>의 쿠라타 히데유키 등, 작중의 표현을 빌리면 “오타쿠 업계의 일선을 넘은, 선인(仙人)같은 사람들”과 저자인 혼다 토오루가 만나, 오타쿠와 연애를 주제로 대담을 벌여 그 내용을 엮은 책이다. 표지와 컨셉에서 짐작할 수 있겠지만, 특유의 자학적 만담 코드, 오타쿠를 빵터지게 하는 갖가지 연애 실패담, 관록이 묻어 나오는 중년들의 오타쿠 라이프 철학 등, 기본적으로는 오락성이 풍부한 경쾌한 읽을거리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정말로 재미있게 읽은 것은, 단순한 오락성과는 약간 다른 부분인데… 그 중의 흥미로운 부분을 몇 가지만 발췌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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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케쿠마: 예를 들면 이제부터 키스하려는 직전에 “잠깐. 나 정말 좋아해?” 같은 걸 추궁하는 여자가 있거든. 그런 건 스스로도 잘 모르잖아. 정말 좋아하는지 아닌지 같은 건. 어쨌든 ‘하고싶다’는 건 확실하지만. 거기서 즉답하지 못하고 ‘정말 좋아하나?’ 라던가를 생각해 버리지. 거기서 이미 안 되는 거야.

타케쿠마: 그러니까, 고백해서 ‘OK에요’라는 대답을 듣고는, 그 후가 계산불가능이 되어버려서 연락을 끊어 버렸지.

타케쿠마: 내가 결혼했을 때도, 왜 실패했는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면, 나 자신이 전인격적 충돌 같은 것을 피하고 있었지. 자신을 안전지대에 놓고, 여유의 부분으로 사귀려고 했던 거야. 상대는 거기에 화가 나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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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키모토: 저는 DQN⑴들에 대한 적의 같은 것이 있어서, “나는 저렇게는 되지 않는다”라고 자꾸 생각해 버리거든요. 여성과 인연이 너무 없었던 탓에 “나만은 DQN 같은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나는 착한 사람이야” 같은 생각이 아이덴티티가 되어서, 어떻게 해도 보통의 사람들이 하는 것 같은 스마트한 연애를 할 수 없게 되어 버렸죠.

타키모토: 왜 글을 쓸 수 없게 되었냐면, <NHK에 어서 오세요!>가 실패작이었으니까요. 그것을 저질러 버린 후 굉장한 죄악감이… 말하자면, “애인이 생기면 그걸로 좋은 거냐?” 같은 거죠.

혼다: 그렇다면, <NHK에 어서 오세요!>는 본래는 “애인이 생겨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를 테마로 한 소설이었던 건가요?

타키모토: 네. 그걸 쓰고 싶었지만….

타키모토: 제가 글을 쓸 수 없게 된 것은, 스스로 쓰려고 했던 것이 자기기만에 빠졌기 때문이죠. <NHK에 어서 오세요!>는 “어떻게 해야 행복해지는가?”가 테마인데요, 제가 생각하기에 행복이란 애인을 만든다/만들지 않는다 와는 별개의, 좀 더 근본적인 곳에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쓰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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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라타: 고등학교 1학년 때 책상에 러브레터가 들어있던 적이 있었어요. 이름은 안 적혀 있었지만, “방과 후에 자전거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같은 내용이었죠. 하지만 그때 전 <밍키 모모>의 재방송을 보려고 그걸 무시하고 집으로 돌아갔거든요(웃음). 비디오를 세팅하는 걸 깜박했었기 때문에, ‘후, 늦지 않았군’ 같은 느낌으로.

쿠라타: 캠프의 밤이라는 게, 보통 고백 대회가 되잖아요. 그때 별 생각 없이 이름을 입에 담은 여자아이를 (일단 이름을 꺼냈으니까) 좋아하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그 후로 그 아이의 좋은 점을 살펴보면서 서서히 좋아하게 되었다던가. 스스로에게 건 암시 같은 거라서, 그게 연애였는지 어땠는지는 미묘하네요.

쿠라타: 고등학교 2학년 때의 그것 쪽이 좀 더 연애에 가까웠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자신의 리비도에 대한 것밖에 기억나지 않는군요(웃음). 이번 취재 때문에 다시 떠올려 보려고 했지만 그 아이의 이름 철자도 기억나지 않았으니까요. 계-속 생각하다가 “확실히, 이시이 히사이치의 만화에 나오는 야쿠르트의… 아, OO다” 같은(웃음).

쿠라타: 저한테는, 요미코가 책을 읽고 있고 그 옆에서 저도 책을 읽고 있는, 그런 형태가 이상이니까요. 미국의 그 실사판(요미코)의 사람과도 메일을 하면 책 이야기 밖에 안 해요. 요즘 이런 책을 읽었다, 이런 책이 좋다, 그런. 뭐 그거면 되잖아, 딱히 뭘 더 할 게 있다는 거야? 같은 거죠. 다른 남자들은 어떤지 몰라도 저는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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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이런 것도 굳이 말하자면 연애 실패담이라 할 수 있겠지만… 역시 어딘가 조금 다르지 않은가?

앞서 말했던, 전형적 오타쿠의 이미지에 대해 잠깐 다시 생각해 보자. 이 관점에서 봤을 때 오타쿠의 핵심적 문제는 뭘까? 수동적인 자세에 익숙하거나, 타인의 입장을 헤아리는 눈치가 없거나, 패션을 비롯한 기본적 상식이 없거나… 요컨데 대인관계에 필요한 모종의 ‘스킬’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 입장에서 본다면 오타쿠들의 고립이란 노력으로 극복 가능한 기술적 문제다. 그렇기 때문에 <전차남>처럼 오타쿠 주인공이 시행착오와 학습을 통해 연애의 상식을 배우고 탈(脫) 오타쿠를 지향한다거나, 스스로의 욕망에 솔직해지고 용기를 내면 ‘리얼에 충실’하게 변할 수 있다는, 일종의 트레이닝 매뉴얼적 해법이 제시되는 것이다.

그런데 <전파대전>에서 오타쿠들이 진술하는 자신들의 문제점은 그 양상이 전혀 다르다. 이들은 그런 매뉴얼적 문제에 대해서 신기할 정도로 별 고민이 없다. 애초에 뼛속까지 오타쿠인 상태로 다들 연애, 결혼, 이혼까지 경험한 것을 보면, 이 사람들의 문제는 처음부터 그런 기술적 차원이 아니었던 것이 아닐까? 그들이 일관되게 지적하는 오타쿠들이 연애와 융화되지 못하는 진짜 이유는, 스킬의 학습이 아니라 마음의 문제다. 감정의 부분에서 결정적인 선을 넘는 커미트먼트가 불가능하거나(타케쿠마), 연애행위 전반에 대한 강렬한 의심과 혐오를 느끼거나(타키모토), 연애관계를 유지시키는 애정을 처음부터 이해할 수 없는(쿠라타)… 심리적 코드의 레벨에서 주류사회의 연애제도와 파장이 전혀 맞지 않는 것이다.

나는 현실의 오타쿠 친구가 없기 때문에, 위의 내용이 평균적인 오타쿠에게 어디까지 일반화 가능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스스로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이것이 생각보다 훨씬 더 흔한 이야기가 아닐까 짐작해 볼 뿐이다. 나 역시 책의 내용에 대해 생각하면서 과거의 경험을 되짚어 보고 깨달은 것이지만, 내가 연애에 실패하는 패턴은 대담자들의 경험담에서 기시감을 느낄 정도로 닮아 있었다. 구체적 방법이나 요령 따위가 아닌, 내밀한 관계를 원천적으로 좌절시키는 어떤 불가해하고 강렬한 거부감… 바로 그곳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는 지적에서 체험적 설득력을 느낀 것이다.

오타쿠 전반에 이러한 경향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 대담집을 쓰고 편집한 당사자들이 누구보다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책의 마지막을 정리하는 해설에서 평론가 야나시타 키이치로는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연애란 전인격적 경험이다. 그것은 인격을 갱신하며, 새로운 자신으로 바꾸어 나가는 경험이다. 거기까지 깨달았다면 오타쿠의 연애가 얼마나 곤란한 일인지 이해할 수 있다. 오타쿠로서의 존재 자체가 연애와 충돌하는 것이다. 오타쿠들이 연애의 문제에서 겁쟁이인 것은, 그것이 자신을 파열시키는 행위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오타쿠의 연애부적응이라는 현상에서 낮은 연애능력치란 피상적 요인에 불과하며, 그 표면 밑에는 더 근본적인 심리적 이유가 있다는 것, 그리고 이 특성은 오타쿠 전반이 공유하는 공통분모일지도 모른다는 것… <전파대전>은 이렇게 오타쿠가 통념적 인식보다 훨씬 복잡한 존재일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었다.

1) 저학력, 몰상식, 불량 등 다양한 뜻이 있으나, 여기서는 ‘연애에 능숙하고 경박한 날라리 같은 남자’ 정도.

Originally published at https://twitter.com/hnbt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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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Ashihara NepuYo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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