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젠더 헤테로 남성으로서 백합 향유에 대한 생각

Ashihara NepuYona
5 min readSep 18, 2023

현재의 백합문화는 시스젠더 헤테로 남성조차 “백합 사이에 끼어드는 남자”에 대해 알레르기적 반응을 보이고 있고, 성애 장면을 통해 성적 쾌락을 얻으려고 하는 경우는 비교적 적어진 편이다. 그런 향유자가 존재는 하지만, 이른바 ‘코어팬’ 층은 시스젠더 헤테로 남성의 경우에 그런 식의 ‘페미티시즘적 대상화’로 보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여전히 ‘당사자’ 입장일 순 없는 노릇이다.

한국 오타컬쳐로 한정할 때, 당연하지만 ‘나는 이런 것도 보는 사람이니까’라는 도덕적 정당성 획득은 백합 향유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히려 몇몇 이들(남성만이 아님)은 트랜스젠더 캐릭터에 대해서는 아무렇지 않게 혐오를 드러내거나, 페미니즘적인 화두를 직접적으로 내비치는 백합물에 대해서도 거부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물론, 여기서 ‘성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귀엽게’ 만드는 것으로 대상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말할 순 있다. 그리고 그게 다른 의미로 페티시즘적이라고도 말할 순 있다. 그러나 그것뿐이라면 남성향 럽코 향유자와 백합 향유자가 겹치지 않는 경우를 따져야한다.

시스젠더 헤테로 남성들이 백합물(혹은 일상물/미소녀동물원)을 즐기는 이유에 대해 논할 때, 페티시즘적 대상화를 얘기하거나(“어쨌든 여자-성기가 둘이라고!”), ‘감정이입 대상’이 될 주인공과 향유자 사이의 괴리를 배제할 수 있단 점을 많이 든다. 전자는 이야기했듯이 ‘코어팬층’에 속하지 않고, 후자의 경우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감정이입 대상’을 제거함으로써 ‘귀여움’이든 ‘아름다움’이든 부감적 시점으로 즐길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 설명 역시 부족하다고 느낀다.

이른바 ‘코어팬’층의 경우에 오히려 여성의 BL향유와 비슷한 경향을 보인다고 생각한다. 백합은 기본적으로 로맨스 장르이고, ‘감정이입’의 대상으로서 ‘주인공 남성’이 배제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감정이입’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할 수도 없다(‘감정이입’만이 픽션의 향유방식이냐는 점은 일단 차치하자).

즉, 나는 로맨스 장르에서 표상으로서 ‘남성’이 존재하지 않기를 원한다는 점만을 동의한다는 것이다. 나는 오히려 근본적인 설명으로서 ‘남성’, 대문자 아버지가 되는 것에 대한 괴리를 부각하고 싶다. 이 설명 안에서는 이른바 부감적 시점, 즉 픽션 내부에 다른 남자들을 배제함으로써 픽션 외부에서 대문자 아버지의 위치를 얻는 것 또한 포함되지만, 반대로 픽션 안밖에서 대문자 아버지에 강렬한 거부감을 느끼는/괴리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포함하여 설명할 수 있다. 덧붙이자면, 나는 전체를 따져볼 때 후자가 더 많다고 믿는다.

우리는 로맨틱 러브, 혹은 에로스가 이미 권력과 강력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 그 때, ‘여성’ 표상들끼리의 연애를 다루는 백합에서는 대문자 아버지의 자리 자체가 사라진다. 이런 재현이 실제 레즈비언들의 경험과 다를지라도 말이다. 이렇게 대문자 아버지에 대한 괴리감이란 측면에서 보면, 후타나리나 트랜스젠더(MTF)에 대한 격렬한 거부감 또한 설명할 수 있다. ‘남근’을 연상시키는 것, 즉 대문자 아버지와 연결되는 것과 그 권력이 제거된 조건 안에서 이뤄지는 연애를 즐기려는 게 시스젠더 헤테로 남성 백합 향유층들의 욕망이 아닌가 싶다. 여기까지가 나의 공식적인 입장이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로맨틱 러브에 대한 ‘대안 실험실’로서, 사랑을 “사랑”으로부터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 주장은 대문자 아버지 제거라는 조건에 대한 욕망의 방향을 더 건설적으로, 즉 로맨틱 러브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으로 이끌어보자는 것이었다.

지금까지는 공적인, 검증가능한 나의 주장을 진술했다. 이 다음부터는, 당신이 나의 증언으로부터 정신의학적으로 분석해 억압된 것을 찾아낼 수는 있을지언정(?), 그 어떤 반박도 통용하지 않는 나 자신의 사적 경험에 근거한 “백합향유”의 이유를 말하고자 한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보편적 경험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결론부터 말하면, 내게 백합은 항상 ‘아방가르드’였다. 내게 가장 처음 ‘백합적’인 인상을 남긴 것은 <마법기사 레이어스> 애니메이션이었다. 당시 지상파 방송 중인 애니메이션은 남아용과 여아용이 분명히 나뉘어져 있었고, 거대 로봇은 남아용의 영역이었다. <마법기사 레이어스>는 그 선을 단박에 가로질렀다.

미취학 아동 무렵의 나(나이 나온다…)는 <마법기사 레이어스>를 보면서 “다른 애들은 그 가치를 몰라보는, 나의 우수한 감식안”이라는 일종의 엘리티즘과, “타겟층이 정해져 있더라도 한 틀에 반드시 갇힐 이유는 없다”는 아방가르드함을 동시에 느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2기에선 주인공 히카루의 어두운 면인 노바가 히카루에게 집착한다는 설정, 그들의 백합적인 관계에서, ‘터부’에 대한 적극적 접근=아방가르드함을 ‘백합’으로 임프린팅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프리큐어>나 <마법소녀 나노하>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마찬가지인 셈이다.

내가 <마법소녀 나노하> 1기에 열광했던 이유는, 공군적인 낭만성을 마법소녀 컨벤션과 결합시킴으로써 ‘하나의 틀에 머무르지 않는’ 횡단성에서 비롯한다. 그리고 이때 비로서 나노하와 페이트의 관계가 ‘백합’으로 불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점이, 일반적으로 내 세대의 입문작인 <마리아 님이 보고계셔>에 별로 관심이 없던 것이나, 내 관심은 (좀 더 문학적 독해를 요구하는) 만화 단행본/잡지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메인스트림과 달리 (스펙터클함을 강조하는) 애니메쪽으로 기운 이유기도 하다.

이는 <전투미소녀의 정신분석>의 분석과 거의 비슷하지만, 나 자신은 조금 결이 다르다고 느낀다. 그 정신분석적 용어로 말하자면 ‘로봇(남근적인 힘)은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다’는 과감한 횡단을 ‘백합’에서 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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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Ashihara NepuYo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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